동아일보 사건의 기억

서대문 형무소 출감 기념으로 오만제단에서 찰칵
발행일 발행호수 2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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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동아일보는 전도관과 신앙촌에 대한 비방을 일삼다 급기야 축복 사진을 놓고 조작한 것이라고 보도를 했다. 이에 소사신앙촌 대학생회를 중심으로 항의 방문을 하게 되었다. 동아일보 사옥 인근에 있다가 나팔을 세 번 불면 사옥 앞으로 모이라고 했다. 길 건너 골목에 있다가 나팔 소리를 듣고 동아일보 사옥 앞으로 가니 이미 경찰이 두 줄로 서있었다. 잔디밭에 섰는데 경찰들이 어린 학생들을 곤봉으로 때려 피가 철철 흐르는 것을 보니 몹시 분하고 화가 났다.

사람들에 밀려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데 경찰이 연탄을 실어 나르던 트럭인지 새카만 트럭을 대놓고 이만제단에 데려다 준다고 하여 그 트럭에 빼곡히 사람들이 탔다. 그리고 도착한 곳은 이만제단이 아니라 마포경찰서였다. 유치장에 있다가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때 집사나 권사처럼 성직이 있는 사람들은 무조건 주동이라고 형무소로 넘겼다. 거짓말을 하면 형무소에 가지 않을텐데 경찰 앞에 서는 순간 “사람 앞에 네가 날 모른다 하면 그 날에 나도 널 모른다 하리라”하는 말씀이 탁 떠올라 집사라고 하자 바로 서대문형무소에 가게 되었다.

겨울이라 몹시 추웠다. 감방 안에 물이 꽝꽝 얼어있었다. 처음엔 나무바닥 방에 있었는데 나중에는 다다미 방으로 옮겨 훨씬 지내기 좋았다. 그 안에서는 할 일이 없었다. 방 안에서 일어나 서지도 못하게 하였고 발도 뻗지 못하게 하였다. 저녁 7시면 취침시간이었는데 다음 날 아침 기상시간까지 일어나 앉아있어도 안 되었다.

우리는 찬송을 했다. 벽을 치면서 박자를 맞추며 찬송을 했다. 어느 한 방에서 시작을 하면 다 따라서 불렀다. 간수의 발자국 소리가 나면 안 한 척 가만히 있다가 지나가면 또 찬송을 불렀다. 감방 안에서는 웃음이 그치지 않았다. 맨날 웃었다. 간수는 도대체 뭐가 즐거워 그 안에서 그렇게 웃느냐고 물었다.

형무소에 들어가며 머리 핀도 다 뺏기고 머리가 세 달 쯤 그대로 자라니 볼썽사나웠다. 미용기술자였던 나하고 다른 한 명이 더 있었다. 입다 해진 푸른색 간수복을 걸레로 주었는데 그걸로 머리를 했다. 다음날이 공판 날이면 전날 저녁 걸레를 찢어 두 줄로 하여 물을 묻혀서 머리에 묶고 잔 후 아침에 잘 빗으면 근사했다. 그렇게 나가니 간수가 깜짝 놀라며 언제 미장원에 다녀왔냐고 할 정도였다. 세수를 하러 가면서 다른 방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일러줘서 전도관 식구들은 공판을 받으러 나갈 때도 말쑥한 모양새였다. 공판을 받고 3년 집행유예로 나와서 신앙촌에 왔더니 다음날 만나식당에 모이라고 하였다. 불을 켰던 것으로 봐서 저녁식사였던 것 같다. 오히려 그 안에서는 그렇게 웃으며 지냈는데 그 식당에 앉자마자 눈물이 쏟아져 통곡을 하며 울었던 기억이 난다.
유병희 권사 /노량진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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