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촌 밍크담요

전국을 풍미했던 담요의 명품
발행일 발행호수 22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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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70년대 기장신앙촌의 색동 담요 공장 모습

“신앙촌 밍크담요요? 그거 한 집에 한두채 없던 집이 없었을 거예요.”
“신앙촌 밍크담요 사려고 담요계가 한창 유행했지요.”
“그 포근한 촉감은 정말 좋았어요. 요즘 극세사 이불을 보면 예전 밍크담요가 생각나요. 환한 장미무늬가 정말 예뻤어요.”

“혼수품 가운데 빠지지 않은 것이 신앙촌 밍크담요고 지금도 가지고 있다는 분도 계셔요.”
“내가 계를 많이 해서 잘 아는데 밍크담요가 3만 5천원 호피담요가 4만 5천원 했어요.” 시온쇼핑 응암동점 황숙희(72) 사장은 1970년도로 기억하며 담요 가격을 말했다.

직접 담요를 짰던 기술자인 이경숙 권사(60.북가좌교회)는 “전남방직의 기술자였다가 덕소신앙촌 모직공장에 기술자로 들어간 게 1968년도였는데 갔더니 이미 담요를 짜고 있었어요. 저는 가서 색동담요도 짰고, 밍크담요도 짰어요. 색동이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밍크 그 다음에 호피담요 순으로 나왔어요. 시중에 담요가 나왔어도 겉으론 비슷한데 써보면 신앙촌 게 좋다고 이구동성으로 말했어요. 따뜻하고 예쁘고, 우리나라에 없던 게 처음 나온 거죠. 말도 못하게 인기였어요. 덕소에서 기장으로 공장이 옮길 때도 모직공장이 가장 늦게까지 있다가 맨 끝에 이전했어요. 참 재밌게 일했던 기억이 나네요.”

‘김치냉장고가 처음 나왔을 때 이미 쓰고 있던 냉장고 말고 또 하나 김치냉장고를 장만하는 것이 주부들의 로망(?)인 것과 같았을까?’라는 질문에 시온합섬 임종기(70) 전무는 “그 정도보다 더 했지요. 돈이 없어도 밍크담요 하나 장만하는 게 꿈이 었으니까요. 그때는 지금처럼 난방이 잘 되던 시대가 아니라 웃풍도 세고 더 추웠는데 밍크담요는 포근하고 따뜻하고 정말 좋았지요.”

그 당시 소비조합을 했던 양금준(78) 사장은 “그때는 뭐든지 미제가 최고로 알아주던 때인데 우리 신앙촌 밍크이불은 미제보다 더 좋다고 했었어요.” 양 사장은 “한 집에 두 장은 기본이었다”고 덧붙였다. 양 사장은 밍크담요는 깔지 않고 덮는 것이기 때문에 이불이라고 말했다.

1970년대 기장신앙촌 당시 담요공장 책임자는 신앙촌 밍크담요 인기가 좋았던 이유를 무늬와 가공기술이라고 했다. “신앙촌 담요의 무늬는 화려했어요. 그리고 다른 공장들과 같은 원사로 같은 기계를 썼는데도 가격과 품질 면에서 경쟁이 안 됐어요. 당시 말로 세팅기술인데 다른 담요는 오래 쓰면 짜부러들고 형편없는데 우리 밍크담요는 짜부러들어도 금방 원상 복귀가 되고 윤이 났어요.”

당시에 동남아 여행객들, 특히 대만 여행객들이 밍크담요 하나씩 들고 나가는 것을 자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더운 나라에서 웬 담요를?’하는 생각이 대뜸 든다. 그 시절 더운 그 나라들에서도 밍크담요 하나쯤은 있어야 행세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주문 받은 것을 그렇게 들고 나갔다는 것이다. 신앙촌 중고 담요는 지금도 아프리카, 중동에 효자 수출품이라고 한다. 덮는 게 아니라 쫙 펼쳐서 벽걸이 용인데 화려한 무늬가 인기 만점이란다.

밍크담요에 대한 행복한 기억을 갖고 있다는 이향미 학생관장(42.소사교회)은 “잠자리에 들기 전 보들보들한 밍크담요 감촉이 너무 좋아서 그 위에서 뒹굴고 부비고 그랬어요. 그리고 그 이불을 덮으면 참 편하고 행복하다란 생각을 많이 했어요. 당시 고가였던 밍크담요를 사려고 동네에서 이불계를 들었던 기억도 나네요.”

최진선 학생관장(29.당산교회)은 밍크담요의 인기를 실감했다고 했다. “몇 년 전에 담양에 요구르트 ‘런’을 홍보하러 갔는데 ‘아, 밍크담요 나오던 그 신앙촌?’하며 동네 분들이 다 신앙촌을 기억하시더라구요, 정말 대단한 인기였구나 놀라고 그 인기를 실감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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