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에 오셔서 한없는 은혜 베풀어주신 하나님”

이순덕 권사(2)/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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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사신앙촌 오만제단 예배 광경 (1960년)

아름다운 소사신앙촌 모습은 놀라워
이만제단 특전대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을 건설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많은 청년들이 건설대원으로 지원하게 되었고, 저 또한 은혜 받는 일에 참여하고 싶어 꼭 건설대에 들어가기를 소망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1957년 11월 신앙촌 건설이 시작되었고 저는 1958년 6월에 소사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스무 살이었습니다.
그때 이미 많은 건물이 지어져 있던 신앙촌은 너무나도 평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서울 시내만 해도 곳곳이 전쟁으로 폐허가 되고 공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판잣집이 들어서 있어 형편없었습니다. 소사신앙촌도 건설 이전에는 황무지같이 메말라 있던 땅이었는데 그곳에 주택과 공장, 학교와 각종 공공시설 등 현대적인 건물들로 멋지게 채워진 모습은 당시에는 찾아보기 어려운 광경이었습니다.

건설하는 동안 많은 은혜 허락해 주셔
3동 주택 공사를 마무리하고 학교 건물을 지을 때였습니다. 학교 운동장에 사람 키를 넘을 정도로 큰 기계 두 대가 있었습니다. 하나는 시멘트 가루를 넣어 시멘트 벽돌을 찍어내고, 하나는 백토와 석횟가루를 넣어 흙벽돌을 찍어냈습니다. 벽돌을 만들기 위해 기계에 재료를 넣고 물과 함께 섞으려면 기계에 달린 손잡이를 재빠르게 돌려야 했습니다. 아주 힘이 센 사람들이 앞장서서 기계를 돌려 벽돌을 찍어주면 그걸 운반부가 받아서 굳히는 곳으로 한 장씩 조심히 옮겼습니다. 저는 운반 담당이어서 찍어준 벽돌을 운반을 했는데 흙벽돌이 유난히도 무거워 2장 정도씩 지게에 얹어 건물 짓는 곳으로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힘을 내서 일하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께서 오셔서 건설대원들 머리 위에 손을 얹어 안수해 주셨습니다. 한번은 제 차례가 되어 안수를 받는데 하나님 손이 머리에 닿는 순간 솜뭉치처럼 사뿐하게 느껴졌고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몸과 마음이 가뿐해져 마냥 기뻤던 기억이 납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건설대 언니들과 함께 은혜 받은 이야기로 꽃을 피우곤 했습니다.

소사신앙촌 노구산 정상에 오만제단을 짓기 시작했을 때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두지휘 아래 제단 터를 다지던 어느 날 저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건설대원들을 빨리 모이라고 하셔서 모두 한달음에 달려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자하신 모습으로 한 명 한 명 안수해 주셨고 저희는 기쁜 마음으로 돌아가 편안히 잠이 들었습니다.
바로 다음 날인 1958년 12월 27일.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셨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찌할 바를 몰라 우왕좌왕하던 순간 ‘아, 떠나시기 전에 오히려 우리에게 힘을 주시려고 부르신 거였구나’ 하며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전도관과 신앙촌을 세워 주시고 많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하나님께서 왜 옥에 가셔야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지만, 조용히 제자리에서 변함없이 따라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전국에 전도관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이 하나님께로 몰려오자 위기감을 느낀 종교계와 일부 정치인들이 결탁하여 억울하게 옥고를 치르시게 했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이순덕 권사(2)/기장신앙촌

구원을 위해 베풀어 주신 끝없는 사랑
그해 겨울에 박한윤 관장님이 소사신앙촌 오만제단으로 발령받아 오셨습니다. 그때 오만제단은 건물을 다 짓지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때때로 관장님은 하나님을 뵙고 오셔서 그 말씀을 전해주셨고 저희는 더욱 마음을 가다듬으며 힘을 내고자 했습니다. 어느 날부터 하나님께서 머리맡에 물을 떠 놓으면 영적으로 축복을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영어의 몸이 되셨음에도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그 사랑을 헤아릴 길이 없었습니다. 또 한번은 하나님께서 소사신앙촌 교인들이 지붕 없는 노천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걱정하신다는 말씀을 전해 듣고 한참을 울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천 앞바다가 얼어붙는 영하 20여 도의 혹한 속에서 고된 옥중생활을 하시면서도 오직 가지들만을 생각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생각을 하니 저희들은 울고만 있을 수 없었습니다. 많은 시험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건설대원과 소사신앙촌 식구들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인 제단 건설에 힘을 쏟아 열심을 다하고자 했습니다. 그렇게 관장님이 부임하신 지 석 달 만에 오만제단을 완공해 예배를 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1년 4개월의 억울한 옥고를 치르시고 1960년 3월 26일 하나님께서 출감하셨습니다. 만 명이 넘는 소사신앙촌 주민들은 새벽부터 오만제단에 앉아 하나님께서 오시기만을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드렸습니다. 뭐라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숙연했던 그 시간. 오만제단 단상 앞에 앉아 저도 뜨거운 마음으로 기도드리며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이 그리워 눈물이 마를 날 없이 보냈던 저희들이 드디어 하나님을 뵙게 된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컸지만, 몸소 받으신 고통의 크기를 알 길이 없어 애통할 따름이었습니다.

마침내 오만제단에 등단하신 하나님께서는 언제나처럼 평안하고 인애하신 모습으로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죄 짐을 지셨네.” 하는 찬송을 인도해 주셨고 따라 부르던 저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 얼마가 지난 후였습니다. 서울 이만제단에서 활동하고 있던 특전대를 소사신앙촌으로 부르셔서 안찰을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는 소사신앙촌 건설대였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그 자리에 불러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특전대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줄을 서서 기다리다 제 차례가 되어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눈과 배에 안찰을 해주시며 하나님께서 “단발머리로 왔었지?”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씀을 듣고 아무 말 없이 나왔지만 내심 깜짝 놀랐습니다. 사실 제가 이만제단 안내부원으로 활동을 할 때 단발머리에 교복을 입고 처음 안찰을 받았던 그때를 기억하시고 말씀하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며칠이 지나 이번에는 소사신앙촌 건설대원들에게 안찰해 주신다고 하셔서 그때도 가게 되었습니다. 그날은 오만제단 단상 쪽에서 줄을 서서 기다렸다가 한 명씩 안찰해 주셨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안찰을 받고 나자 마음이 너무나도 평안하고 기쁨으로 가득해져 또 한 번 감사드렸습니다.

또 얼마가 지난 후 이번에는 하나님 댁에서 건설대원들에게 식사 대접을 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문 앞까지 갔다가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되돌아 나와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건설대원들을 이렇게 자꾸 불러주시는 이유가 아마도 어려움 속에서도 더 큰 힘을 주시려고 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내 죄를 씻어 구원을 얻고자 건설대원으로 참여해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며 하나님께서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렸을 뿐이었던 저희들에게 한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번은 하나님께서 예배 시간에 두 번째 울타리 덕소신앙촌 건설을 준비하고 계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옥고를 치르시고 돌아오신 후 한시도 쉬지 않으시고 태산 같은 일을 계획하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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