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알곡이 되기를 오늘도 기도드립니다

이순덕 권사(3)/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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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수한 바 모든 알곡 천국 창에 들인 후 주가 베푼 연회석에 우리 들어가겠네”

수백만이 체험한 은혜를 가짜라니…

이순덕 권사(3)/기장신앙촌

1960년 12월은 동아일보 사건이 있었던 때입니다. 전도관과 신앙촌에 대한 비방 보도를 일삼던 동아일보가 급기야 이슬성신이 찍힌 사진이 조작됐다는 어처구니없는 기사를 신문에 실은 것입니다. 저도 그렇고 이슬성신 은혜를 체험한 사람이 수백만인데 그것을 가짜라고 하니 그저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습니다. 동아일보사에 정정보도를 요구하고 항의를 하러 간다기에 소사신앙촌 주민들과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동아일보사 앞에 모여 있는데 갑자기 신문사 문이 열리더니 뒤에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떠밀려 얼떨결에 3층까지 올라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순식간에 경찰들이 따라 올라오더니 저희들을 한곳으로 몰아세워 놓고 아래로 밀어내기 시작했습니다. 2층으로 떠밀려 가던 중 경찰들이 우리 교인들을 들어서 창밖으로 내던지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는데 말릴 새도 없이 1층으로 다시 떠밀려 가니 최루탄 냄새에 숨을 쉴 수가 없어 코와 입을 틀어막고 건물 밖으로 뛰쳐나갔습니다.

그때 경찰들이 소사신앙촌에 데려다준다며 바로 트럭에 태웠는데, 차를 타고 가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트럭이 멈춰서 보니 소사신앙촌이 아니라 서대문 경찰서였습니다. 한 명씩 조사를 받을 때 저에게 주동자가 누군지 물어보기에 “누가 주동해서 따라간 것이 아닙니다. 은혜 내리는 게 사실인데 그걸 찍은 사진이 조작됐다고 하니 너무 억울해서 찾아갔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니 더 이상 묻지 않았고 열흘 정도 유치장에 갇혀 있다가 소사신앙촌으로 돌아가게 됐습니다. 그때 정작 조사를 받아야 할 것은 우리가 아니라 거짓을 보도한 언론이며, 진짜를 가짜로 둔갑시키는 억울한 세상에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시련은 연이어 찾아왔습니다.
불과 한 달 후인 1961년 1월 하나님께서 또다시 영어의 몸이 되셨습니다. 1차 옥고 때와 마찬가지로 일부 정치권과 특정 종교계가 터무니없는 죄목을 뒤집어씌운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첫 번째 옥고를 치르실 당시 부정선거를 도와 그 대가로 사면을 받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죄목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해하려고 모진 옥고까지 치르게 했던 정권에 협조할 리 만무한데, 없는 죄도 만들어 내는 세상이구나 하며 울분으로 가슴이 터질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1차 옥고 당시 있었던 일이 떠올랐습니다.

1959년 2월 20일에 있었던 재판이었습니다. 방청권 없이는 법정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을 알면서도 저는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는데 우연히 법정 앞에서 교인 분을 만나 방청권을 받게 되었습니다. 법정에 들어서신 하나님께서는 평안하신 얼굴로 저희가 있는 방청석을 유심히 바라보시며 앞자리로 걸어가시는데 저는 왜 이런 일을 당하셔야 하는지 원통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재판이 시작되고는 더 가관이었습니다. 법정에서 법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종교 이야기만 늘어놓는 것이었습니다.

판사가 증인석에 있던 유호준 목사에게
“박 장로가 어떻게 해서 이단인가 말해 보시오.” 하고 질문했습니다. 유호준 목사는 자신 있는 태도로 “박태선 장로는 아무리 보아도 사람인데, 사람이 사람의 죄를 사한다고 하니 이단입니다.”라고 답변했습니다. 또 유 목사는 이슬성신과 향취 등에 대해서도 “박 장로가 영적인 사실을 오관(五官)의 대상이 되는 물체로 설명한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종교 재판도 아닌데 왜 법정에서 이단 운운하는 말을 들어야 하며, 저도 직접 보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체험한 은혜를 두고 말이 안 된다고 비방하니 억울한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유 목사 앞으로 가시더니 준엄하신 음성으로 “요한복음 20장 22절을 아십니까?” 하시며 “성신을 받으라, 성신을 받으면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지고 정하면 정하여지리라 했지요?” 하시니 유 목사는 우물쭈물하며 아무런 답변도 하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앞에서는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거짓말을 못 하겠지요?” 하시자 유호준 목사는 도망치듯 법정을 나가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곳에서도 내가 예배를 인도하면 성신이 내립니다.” 하셨습니다.

하나님 함께해 주신 시간이 마음속에 남아
이듬해인 1962년 영어에서 돌아오신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경기도 덕소에 두 번째 덕소신앙촌 건설을 지휘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수많은 핍박과 방해 속에서도 이 역사는 백절불굴의 강인함으로 지속된다는 것을 그때 알 수 있었습니다.

덕소신앙촌 건설을 위해 소사신앙촌의 주택 건설대원들이 7월 10일 무렵에 1차로 떠났고, 열흘 후에는 소사신앙촌 제단 건설대가 가게 되었습니다. 제단 건설대였던 저도 친구 6명과 함께 덕소신앙촌에 도착해 보니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안찰해 주시며 은혜를 부어 주셔서 감사한 마음으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제일 먼저 공장 건물을 짓기 위해 8인치 콘크리트 블록을 한 단씩 쌓아 올렸는데, 하루는 A, B반으로 나뉘어 블록 옮기기 시합을 하게 되었습니다. 합심해서 서로 도우며 최선을 다하다 보니 동작이 느리고 굼뜬 저도 뛰어다니며 바쁘게 일하게 되었고 저희 팀이 이겼을 때는 얼마나 기쁜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생전 뛸 줄을 모르고 느림보였던 제가 선의의 경쟁 속에서 바쁘게 달리는 것이 얼마나 기쁜지 그때 처음 알게 됐습니다.

공장 건물 2층을 쌓을 때는 블록을 옮겨 놓을 곳이 협소해서 지나다닐 공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그래서 블록을 가져다 놓은 후 조심하며 1층으로 내려가고 있는데 뒤에 따로 오던 건설대 언니가 저에게 “빨리 내려가!” 하며 호통치듯 말을 했습니다. 언니 보기에는 느릿느릿 걷는 제가 답답했던 모양인데, 나름대로 부지런히 걷던 저는 속이 상해 “지게꾼이 지게꾼 사정을 모르면 어떻게 해!” 하고 퉁명스럽게 말해버렸습니다. 그런데 블록을 가지고 다시 2층으로 올라갔더니 하나님께서 언제 올라와 계셨는지 저를 보시고 부드러우신 음성으로 “내가 다 안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제 마음을 다 아시고 말씀해 주시니 부끄럽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했습니다.

어느 날 하나님께서 운전해 주시는 배를 타고 건설대원들과 함께 한강을 건너 모래를 가지러 간 때가 있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저 높은 곳을 향하여 날마다 나아갑니다’라는 찬송을 불러주셔서 저희도 따라 불렀습니다. 햇살에 반짝이는 아름다운 강물과 그 위에 퍼지던 찬송 소리가 어제 일처럼 기억이 납니다. 또 콘크리트 작업을 하기 위해 땅 파기를 할 때는 하나님과 함께 ‘웬 말인가 날 위하여 죄 짐을 지셨네’라는 찬송을 부르며 일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한 시간들은 제 마음속에 보석으로 남아 지금도 그 찬송을 부를 때면 그때 광경이 뭉클하게 떠오르곤 합니다.

한번은 모래를 건설 현장으로 운반할 때였습니다. 비가 온 뒤라 땅이 미끄러울 것 같아 모래를 지고 조심히 가려는데 저 멀리 계시던 하나님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비에 젖은 땅 위를 마른 모래로 덮어 단단히 다져주고 계셨습니다. 저희들 넘어지지 말라고 염려해주시는 마음만으로 감사할 따름인데 누구보다 먼저 길을 정돈해 주고 계시니 너무나도 황송해 몸 둘 바를 몰랐습니다.

하루는 하나님께서 시멘트 반죽을 만드는 담당자에게 얼마의 비율대로 만들고 있는지 자세히 물어보셨습니다. 시멘트 반죽을 만들려면 모래와 시멘트와 물을 1:1:1의 비율로 잘 배합해야 하는데, 당시는 건설이 한창 진행 중이라 담당자들이 으레 알아서 하겠거니 하고 현장 책임자들도 비율을 확인하는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공장과 주택, 학교와 교회까지 하나의 도시라고 할 만큼 큰 규모의 신앙촌 건설을 진두지휘하시면서도 건설의 기본이 되는 시멘트 배합까지 세밀히 살피시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강변 쪽 아파트를 지을 때 저는 방바닥에 넓고 납작한 돌을 옮기는 일을 했습니다. 기술자들이 그 위에 황토를 깔고 시멘트로 굳혀서 온돌방을 만들었는데, 좋은 재료로 무척 튼튼하게 지어진 아파트를 보면서 저도 어머니를 모시고 이 아파트에서 살고 싶어졌습니다. 당시 소사신앙촌 때보다 월급이 인상되어 차곡차곡 돈을 모으고 있던 저는 아파트가 완공된 후에 한 채를 구입할 수 있었습니다. 그때 어머니도 덕소신앙촌에 들어오셔서 같이 살게 되었는데 창밖에 보이는 풍경은 단풍이 물들어가는 산과 한강 줄기가 어우러져 일품이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덕소신앙촌에서 어머니와 함께 지내게 되어 감사를 드렸습니다.

한없는 은혜를 주셨던 추수감사절
주택 지대의 건물을 올릴 때 즈음 덕소신앙촌 교회를 짓기 시작했습니다. 크고 웅장한 교회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드릴 생각에 기쁘게 일했습니다. 교회가 완공되고 처음으로 추수감사절을 맞이했을 때는 새벽예배를 마친 후 하나님께서 아주 커다란 인절미를 신앙촌 주민 모두에게 나눠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는 서울 지역 전도관에서 추수감사절 예배를 인도하신 후 덕소신앙촌으로 돌아오셔서 다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추수한 바 모든 알곡 천국 창에 들인 후 주가 베푼 연회석에 우리 들어가겠네’ 하는 추수 찬송을 인도하셨는데, 찬송가 뜻을 생각하며 따라 부르던 저는 ‘나도 알곡이 되어 영원한 천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에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알곡이 되고 싶은 소망으로 뜨겁고 간절했던 그날 예배는 지금도 제 마음에 남아 힘이 되어 주고 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덕소신앙촌 기록화(전혁림 화백 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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