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의 향기를 맡은 후 제 마음에 기쁨이 샘솟는 것이 놀라워

공병순 권사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3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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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29년 경기도 수원군 오산면에서 5남매 중 넷째로 태어났습니다. 너른 농토를 소유하고 큰 정미소를 운영했던 저희 집은 부족한 것 없이 부유하게 생활했습니다. 그러던 중 제 나이 열네 살 무렵에 아버님이 원인 모를 병을 앓다가 돌아가시고 2년 뒤에 어머니마저 갑자기 세상을 떠나시면서 가세가 많이 기울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을 여읜 후로 저는 오빠네 집에서 지내다가 열아홉 살에 결혼해 서울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1950년에 6·25 전쟁이 일어났을 때 저희 가족은 경상북도 예천군에 있는 시댁으로 피난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저는 해산한 지 얼마 안 된 몸으로 갓난아기를 업고 꼬박 열이틀을 걸어서 시댁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어른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별 탈 없이 지냈으나 피난길에서 보았던 처참한 광경은 쉽게 잊히지 않았습니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울부짖는 피난민의 모습과 수시로 퍼부었던 무시무시한 폭격, 그리고 폭탄 파편이 날아와서 발 앞에 꽂혔던 일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몸서리가 쳐졌습니다. 저는 사춘기 때 부모님을 잃은 뒤로 삶이 허무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참혹한 전쟁까지 겪으면서 ‘암흑같이 깜깜한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종교를 가지면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지지 않을까 하여 교회에 다니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싶어졌습니다.

사춘기때 부모을 잃고, 6.25 전쟁을 겪으면서
허무와 두려움, 불안에 싸여
마음의 위안을 위해 교회에 다닐 생각
그때 마침 수원전도관으로 인도 돼

피난생활이 끝나고 1956년에 수원으로 올라오게 되면서 저는 교회에 나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수원에서 가장 큰 교회인 제일교회에 나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날 이웃에 사는 이 집사님이라는 분이 자신이 다니는 교회에 가자고 하여 따라갔더니 그곳은 ‘수원전도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그곳은 천막을 쳐 놓고 가마니를 깔고 앉아 예배를 드렸는데 저는 천막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그다지 내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에게 저는 원래 제일교회에 나갈 생각이어서 전도관에 안 다니겠다고 했더니, 그분은 자신도 다른 교회에 다녀 봤지만 전도관에 나와 비로소 은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전도관에 나갈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다음 날부터 이 집사님이 자주 찾아와서 같이 가자고 권유하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나 지극정성으로 설득하는지 매번 거절하는 것이 미안할 정도였습니다. 한번은 “미안하게 왜 자꾸 데리러 오세요?” 하고 물었더니 “전도관에 가면 은혜를 받을 수 있어요. 그래서 가자고 하는 거예요.”라고 했습니다. 그처럼 간곡하게 권유하니 ‘아무것도 아닌 나 같은 걸 이렇게 찾아오시는구나. 그 정성에 보답이라도 해야겠다.’ 하며 전도관에 다시 나가게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
마치 향기 덩어리가 날아와 목구멍으로 쏙 들어오는 느낌
함께 계시던 전도사님은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해
그 후에 끊임없이 솟아나는 그 기쁨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어

그러던 3월 어느 날이었습니다. 이 집사님이 “새벽 기도를 가야 은혜를 받아요. 내일 새벽에 깨워 줄 테니 같이 갑시다.”라고 하여 저는 다음 날 처음으로 새벽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에는 전도사님과 교인들이 제단 밖에서 대화를 나누며 오늘 은혜가 많이 내렸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예배 시간에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예배 시간에 은혜가 많이 내렸다고? 은혜가 어떤 것일까?’ 하며 그분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갑자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더니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하는 것이었습니다. 마치 향기 덩어리가 날아와 제 목구멍으로 쑥 들어오는 느낌이었습니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봐도 그렇게 좋은 냄새가 날 만한 것은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어떻게 된 일인지 의아했습니다. 이 집사님에게 “어디서 이렇게 좋은 향기가 나는지 모르겠어요. 갑자기 바람이 불더니 향기가 내 입으로 쑥 들어왔어요.”라고 하자 집사님은 “그게 은혜 받은 거예요. 향취에요.” 하며 무척 좋아했습니다. 함께 계시던 전도사님은 그 향기가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라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무엇보다 놀랍고 신기했던 것은 그 향기를 맡은 뒤로 제 마음에서 기쁨이 샘솟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기쁘고 즐거운지 끊임없이 솟아나는 그 기쁨을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었습니다.

다음 날 새벽 저는 이 집사님이 깨우기도 전에 미리 준비해 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설교 시간에 ‘찬송은 곡조 있는 기도’라 하시며 뜻을 생각하면서 부르라고 하시기에 한 구절 한 구절 의미를 생각하며 찬송을 불렀더니 새록새록 그 뜻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특히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하는 찬송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참 동안 찬송을 부르다 보니 바닥에 깔린 가마니에서 풍기던 냄새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아주 향긋하고 좋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그 전까지 저는 이왕이면 큰 교회에 다니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은혜를 받고 보니 그런 것은 아무런 상관이 없었고 자그마한 천막 제단이 더할 수 없이 편안하고 아늑하게 느껴졌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며 수원제단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만제단 개관집회에 가서
등단하시는 박태선 장로님 머리 뒤로
빛나는 광채가 둘려 있는 것을 보고
‘과연 보통 분이 아니시구나’ 생각

이듬해인 1957년 4월에는 서울 이만제단에서 개관집회가 있었습니다. 한강변의 산언덕에 우뚝 세워진 이만제단의 위용은 실로 대단했으며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 또한 어마어마한 숫자였습니다. 저로서는 그처럼 큰 건물과 엄청난 인파는 난생처음 보는 모습이었습니다. 예배실에는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서 도저히 틈이 없었지만 그래도 비집고 들어가 단상과 가까운 앞쪽에 앉을 수 있었습니다. 곧이어 박태선 장로님께서 등단하실 때 단상을 바라보았더니 놀랍게도 박 장로님 뒤로 빛나는 광채가 둘려 있는 것이었습니다. 혹시 잘못 보았나 싶어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봤으나 분명히 환하게 빛나는 광채가 박 장로님 머리 뒤에 둥그렇게 둘려 있었습니다. 그 찬란한 빛을 바라보며 박 장로님께서는 과연 보통 분이 아니신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병삼 관장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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