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천막집회의 현장을 가다(12) 원주집회-‘원주’市 이야기

1955년에 市로 승격한 원주, 1군사령부 주둔으로 성장
발행일 발행호수 21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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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53년에 원주천교 밑에서 그네뛰기 대회를 하는 모습이다. 원주천 주변은 이렇게 행사를 위한 자리였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에서

지금의 도시 규모를 생각하면 ‘원주는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닌데’ 하는 생각에 강원도 원주에서 집회를 하셨다는 사실이 조금은 뜻밖이었다.
 
그러나 원주라는 도시의 특성을 이해하고 나면 원주는 결코 작은 도시가 아니다.
 
예로부터 전쟁, 군대와 깊은 관련을 맺어온 원주시는 6·25가 터지자 군사 요충지였던 관계로 치열한 싸움터가 되어 시가지가 거의 잿더미로 변하는 비운을 맞는다.
 
1953년 말에는 잿더미만 남은 원주에 인제군 기린면 관대리에 주둔하고 있던 야전군 사령부가 옮겨 왔다. 원주는 한반도의 동서와 남북의 중앙 지점에 위치하여 전술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곳이다. 그리고 사통팔달의 도로망과 중앙선 철도는 야전사령부를 이곳으로 옮겨오게 하는데 중요한 구실을 하였다. 동해안으로부터 서해안에 이르는 155마일 전전선을 관장하는 사령부였던 것이다.
 
제1군사령부 앞에는 미군기지 CAMP LONG이 있다. 지금은 많이 감축되었지만 설치 당시에는 상당히 큰 규모였다. 그로인해 소읍에 불과했던 원주는 1955년 9월 시로 승격되기에 이른다. 제1군 사령부가 이곳으로 옮겨오자 사령부의 직할부대 및 전투근무 지원부대가 시내 곳곳에 들어오고, 이에 따라 군인 가족과 그들을 상대로 장사를 하려는 사람들로 인하여 원주는 급격한 인구 증가와 함께, 한적했던 조그마한 도시에서 붐비는 큰 군사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청량리에서 부산간 운행되는 중앙선 열차는 원주역에서 정차 시간이 가장 길었으며 이곳에서 타고 내리는 손님도 가장 많았다. 이들은 주로 상인, 전 출입 장병, 장병 면회객이 대부분으로 열차에서 절반 이상의 사람들이 원주역에서 승하차하였다.
 
군사도시로서 원주는 의류나 생필품을 생산하는 공장이 거의 없는 전국 제일 규모의 소비도시로 성장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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