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천막집회의 현장을 가다(1) 남산집회

천지를 진동했던 남산집회...그현장엔 울창한 소나무 숲만
발행일 발행호수 2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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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먼저 열흘간 열렸던 남산집회 장소부터 정확하게 찾아보기로 했다. 남산에는 일제에 의해 조선신궁이 들어서면서 384개의 돌계단을 비롯, 웅장한 참배로가 만들어졌다. 주요 참배로는 숭례문에서 남산 꼭대기에 이르는 구간의 성벽을 헐어 그 석재를 이용해 만들었는데, 그 출발점이 숭례문 언저리였다. 숭례문에서 소월길을 따라 500m 남짓 걸으면 구름다리를 지나 힐튼호텔 앞에 닿게 된다. 힐튼호텔 맞은편으로 석축이 보이는데 그곳에서부터 차례대로 어린이 놀이터와 백범광장, 안중근의사 기념관 , 남산식물원 등이 자리 잡고 있다. 현재 남산식물원자리가 일제시대에 신궁이 있던 곳이다.
남산공원이라고 막연히 알려져 있던 집회장소는 정확히 말하면 지금의 백범광장 자리이다. 현재 백범광장은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있는 자리에 비해 약 100여개의 계단 아래에 있다. 지금은 차도가 백범광장과 안의사 기념관 사이를 가르고 있지만 집회 당시에는 차도도 없었고 안의사 기념관과 거의 같은 높이였다. 신궁에 있던 3개의 광장 중 가장 아래쪽 광장에 해당하는 공간이다.
“예전에 남산에 하나밖에 없던 차로가 지금의 안의사 기념관이 있는 곳에 있던 다리 아래를 통과해서 리라학원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계단을 올라오면 광장을 지나 다리를 지나 신궁터까지 일직선이었는데, 그러니까 이 산이 상당히 많이 깎인거죠.” 지금의 힐튼호텔자리에서 태어나고 남산이 어린시절 주요 놀이터였던 이길원 전무(63, 한일물산)는 남산의 예전모습을 그대로 기억하고 증언해주었다. 지금은 없어진 돌계단 아래쪽에 걸려있던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에 쓰여 있던 ‘불의 사자 박태선장로 심령부흥회’라는 문구가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말하는 이전무는 그 계단을 올라가보면 까마득히 천막이 쳐져있었던 기억이 선명하다고 했다.
집회장 근처에는 하나님의 집회를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있고, 시내 도처에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전봇대에 붙은 포스터를 보고 집회가 열리는 것을 알았다는 신성선승사(78. 덕소신앙촌)는 당시에 다니고 있던 남대문교회의 목사가 하나님의 남산집회를 소개하며 ‘가서 은혜 많이 받으라’고 했다고 한다.
“둘째 아이를 임신하고 넘어진 일이 있고 그 일로 고생을 한 후 아이를 낳았는데 아기가 살도 없고 빼빼 말라 젖도 못 먹을 정도였어요. 그런 아이를 안고 남산집회를 참석했는데, 저는 집회 첫날부터 열흘간 꼬박 그 자리에 있고 시어머니가 집으로 오가며 식사를 해다 날라주었습니다. 사람들이 어찌나 많은지, 자리에서 한 번 일어나면 내자리는 없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앞쪽에는 환자들이 많았었어요. 저는 아주머니들이 많이 앉은 쪽에 한 중간쯤 자리에 앉았었어요. 집회 기간에 새벽예배를 마치면 하나님께서 꼭 다 안수를 해주셨어요. 그런데 어느 새 아기는 울지도 않고, 집회가 다 끝나고 집으로 돌아올 때 아기의 얼굴은 발그레해져 있었어요.” 남산에 같이 오른 신성선권사는 단상이 있던 자리며 본인이 앉아있었던 자리를 가늠해보며 예전의 기억을 나누었다.
전명원권사(78. 구리교회)는 당시의 기억을 이렇게 말한다. “그 때 남대문(숭례문) 근처를 버스를 타고 지나는데 차가 앞으로 가지를 못하는 거예요. 지금 데모하면 차가 못 가듯이 꼭 그랬어요. 남산의 그 높은 계단을 많은 사람들이 하얗게 오르는 것이 보이고, 또 왜들 그렇게 뛰던지 그 인파 때문에 차가 못나갈 정도였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앞자리를 차지하려고 그렇게 뛰지 않았나 싶어요.” 인산인해를 이루는 인파를 보고도 당시에 신앙에는 관심이 전무하다시피했다는 전명원권사는 집회에 직접 참석하지는 않았었다고 한다.
당시에 집회는 3월 26일 저녁 7시 집회를 시작으로 다음날부터 매일 새벽집회, 오전 10시, 오후 2시, 저녁 7시에 집회를 하고 마지막 날인 4월 5일에는 새벽집회를 하고 마쳤다. 열흘간의 집회기간에 무려 38번의 예배를 보았던 당시 집회에 참석한 인원에 대하여는 당시에 발행된 기독공보(1955.4.11)를 보면 자세히 나와 있다.
“신앙의 신비경 이룬 남산, 그들은 무엇을 갈망하였던가?”란 제하의 기사에 연 60만 명의 인파가 모여 대성황을 이룬 남산집회에 대해 매 집회마다 모인 수를 보고하고 있는데, 첫날 저녁 7시 집회에는 4000명, 토요일과 일요일인 2일과 3일 저녁집회에는 35,000명이 참석했다고 하고 집회 마지막 날인 5일 새벽집회에는 15,000명이 참석했다고 적고 있다. 당시 남산광장으로 가는 교통편이나 집회를 알리는 방송이나 신문매체가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낙후했다는 점을 고려해 볼 때 열흘간 열렸던 남산집회에 모였던 참석자의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고 할 수밖에 없다.
50년의 세월이 흐른 남산광장의 옛모습을 찾을 수 없으나 그 때 받은 은혜는 지금도 생생하게 교인들의 마음 속에 남아 50년동안 꺼지지 않는 신앙의 불을 피우고 있다. 
 
<남산집회 이야기>
 
민성녀 권사(소사신앙촌)제가 남산집회장에 도착했을 때는 그날의 예배시간이 끝났는지 드문드문 자리가 비어 있었습니다. 저는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아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다음 날 새벽, 예배를 인도하러 단상에 나오신 박 장로님은 하얀 와이셔츠에 회색 바지 차림이셨는데, 그 모습이 너무나 깨끗하고 단정해 보였습니다. 또 어느 날에는 박 장로님께서 찬송을 한참 동안 인도하시다가 멈추시고 “여기에 와서 병 나은 사람들은 다 일어나라.” 하시니, 여기저기에서 환자들이 너도나도 일어나 자신들의 병이 나았다고 외쳤습니다. 이곳저곳에서 저마다 외치는 소리로 집회장은 한바탕 왁자하였습니다. 그들 중 초등학교 5~6학년쯤 돼 보이는 남자 벙어리 아이가 말문이 트여 마이크 앞에서 “엄마-”를 부르고, 앉은뱅이가 일어나서 기뻐 영광을 돌리는 광경도 볼 수 있었습니다.
안음전 승사(뉴욕교회)서울에 도착하여 집회 장소인 남산을 찾아가 남산 계단을 올라가는데, 어디서 나는 것인지 기가 막히게 좋은 냄새가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계단을 쭉 걸어 올라가 사람들이 모여 있는 집회장 안으로 들어가는데도 그 좋은 냄새는 계속해서 쏟아 붓는 것 같았습니다. 집회장 바닥에는 가마니가 깔려 있고 그 위에는 많은 사람들이 비좁게 앉아 있는데, 병자들도 많이 보였습니다. 찬송가 418장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찬송을 인도하시는데 사람들이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부르니 저도 따라서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불렀습니다. 마음이 너무나 기쁘고 날아갈 것 같았습니다.
 
송혜영기자news-song@theweek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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