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평행이론

발행일 발행호수 25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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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행이론이라는 말이 있다.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일어난 사건이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것을 가리킨다. 평행이론으로 역사를 설명하는 학자들은 과거의 사건이 닮은꼴로 지금도 일어난다고 한다. 오늘 우리가 접하는 뉴스도 알고 보면 수백 년 전 사건이 평행이론으로 반복되는 것인지 모른다.

유럽에 성적인 방종이 극심했던 15세기 무렵, 연대기는 흥미로운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가톨릭 수녀원에 있는 연못은 물고기가 아무리 많아도 낚시를 금지했다는 것이다. 연못에서 갓난아기 시체가 발견돼 수녀원의 평판이 나빠지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고 한다. 당시 독일 울름의 죄플링겐 수녀원은 수녀 대부분이 임신한 상태였고 수녀원에 분만대가 있는 것이 공공연한 상식이었다. 일례로, 로마에 있는 수녀원의 연못에 물을 빼내자 연못 바닥에 가라앉아 있던 6,000개의 영아 두개골이 발견됐다.

이와 닮은 사건이 2014년 아일랜드 서부의 투암에서 있었다. 수녀원이 운영하던 미혼모 시설 ‘성모의 집’ 정화조에서 800개에 이르는 영유아 유골이 발견됐다. 1961년 시설 폐쇄를 앞두고 집단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사건이 알려지자 아일랜드에서는 영유아를 암매장한 가톨릭교회를 집단 학살죄로 처벌하라는 촉구가 이어졌다. 수녀원과 영유아 유골, 집단 암매장까지 평행이론으로 들어맞는 사건이었다.

평행이론이 적용되기는 낙태도 마찬가지였다. 16세기 독일의 시인 피샤르트는 이렇게 기록했다. 임신한 수녀들이 독한 약물을 이용해 낙태하거나 출산 즉시 아기를 목 졸라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했다는 것이다. 수녀들은 성직자의 아기를 가지는 것이 일상이었고, 낙태할 시기를 놓치면 다른 수녀들의 도움을 받아 갓난아기를 살해했다. 이 사실은 민중들에게 알려져 “수녀님들은 신앙에 정진한 덕분에 모두 배가 불룩해졌다네.” 하며 비웃음거리가 되었고, 연대기는 ‘수녀들은 자기 배를 괴롭힌 아기들을 죽여 버렸다.’라고 기록했다.

당시 교황청은 낙태를 엄중하게 금지하면서도 뒷문으로는 낙태를 향한 길을 활짝 열어 두었다. 낙태죄 면죄부를 발행한 것이었다. 독일 화폐로 5그로시를 내고 면죄부를 구매하면 낙태를 했어도 사회법은 물론 천국의 법에서도 처벌받지 않는다고 했다. 낙태뿐 아니라 출산 후에 아이를 죽여도 5그로시짜리 면죄부를 구입하면 역시 처벌받지 않았다.

가톨릭 성직자들은 면죄부를 정기적으로 구입함으로써 무고한 생명을 죽인 책임에서 벗어나 마음껏 향락을 즐길 수 있었다. 교황이 낙태를 금지한 것은 두 가지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아직 배 속에 있는 태아조차 죽이면 안 된다고 목소리를 높이면서 생명 존중의 종교로 군림할 수 있었고, 면죄부를 판매함으로써 교황청 금고에 돈이 쌓이게 되었다.

16세기에 벌어졌던 낙태와 쌍둥이처럼 닮은 사건이 1995년 2월 교황청에 보고되었다. 이 보고서는 23개국의 가톨릭 성직자를 조사한 결과 수녀들이 사제의 아이를 임신한 후 낙태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했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독한 약물로 낙태하던 것이 가톨릭 병원에서 임신 중절 수술을 받는 것으로 바뀐 것이었다. 사제들은 자신이 임신시킨 수녀를 병원까지 데려와 낙태 수술을 받게 했다.

교황청은 500년 전처럼 면죄부를 발행하지는 않았지만 과거와 마찬가지로 성직자들을 처벌하지 않았다. 낙태에 관여한 모든 사람을 자동 파문한다는 가톨릭법이 버젓이 존재했지만 낙태를 강요한 사제에게 그런 처벌을 내린 적이 없었다. 덕분에 가톨릭 성직자들은 태중의 무고한 아이를 살해할 수 있었다.

1995년 이러한 내용의 낙태 보고를 받은 교황청은 아이러니하게도 ‘생명의 복음’이라는 교황회칙을 발표했다. 모든 생명을 존중해야 하고 낙태는 절대 허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최근에도 우리나라에서 낙태죄 헌법 불합치 결정으로 낙태가 더 이상 죄가 아니게 되자 가톨릭은 ‘낙태는 무고한 생명을 직접 죽이는 범죄’라며 반발하고 나섰다. 이만큼 평행이론을 잘 보여 주는 사례도 없다. 시공간을 초월한 살해, 책임과 처벌을 피하는 기술, 거기에 생명을 존중한다는 사기극까지 평행이론에 들어맞는다.

하지만 세상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한때 국민의 80%가 주일미사에 참석했던 아일랜드는 참석률이 20%로 추락했다. AP통신 등 언론은 가톨릭이 신뢰를 잃은 것은 그동안 사회적 약자를 괴롭힌 가혹 행위가 가져온 결과라고 분석했다. 종교 집단의 손아귀에서 죽어간 무고한 생명들은 암흑의 역사가 반복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인 악행이 낱낱이 까발려진 후에도 여전히 그 집단이 거룩함으로 위장하는 사악한 기교는 변함이 없다. 그 한결같은 위선이 괴이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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