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기적을 보고 자초지종을 확인해 보다

장말례 권사(1) / 부평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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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제가 전도관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은 1958년 강원도 원통에서 살 때였습니다. 저희 옆집에 사셨던 김 집사님은 원통으로 오기 전부터 전도관에 다녔던 분으로, 원통에 전도관이 없어 자기 집에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김 집사님이 자기 집에서 같이 예배를 드리자고 자주 권유하셔서 저는 가끔씩 거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하루는 예배를 드리러 갔더니 벽에다가 찬송가를 써서 붙여 놓은 것이 보였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하는 찬송가였는데, 나의 기쁨, 나의 소망 이런 가사가 참 좋아서 보고 있을 때 누군가 그 찬송을 부르자고 했습니다. 처음 보는 찬송이었지만 사람들을 따라 부르면서 왠지 모르게 기쁘고 마음이 환하게 밝아지는 느낌이었습니다. 사람들과 함께 동그랗게 모여 앉아 찬송을 부르는 것이 좋아서 저는 차츰 일요일예배에 빠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곳에 사람들이 계속 전도되면서 얼마 후에는 김 집사님 댁 마당에 천막을 크게 쳐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김 집사님이 인천전도관에 가서 하나님 집회에 참석할 거라고 하여 저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차편이 마땅치 않아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인천에 도착해 보니, 언덕 위에 우뚝 세워진 인천전도관이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날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설교를 하신 후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전부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안수를 마치시고 병 나은 사람은 앞에 나오라고 하시자, 사람들이 나가서 축농증이 나았다, 무슨 병이 나았다 하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던 중, 예배실 한쪽에서 “앉은뱅이가 일어섰다!”는 소리가 들려 그쪽을 봤더니 젊은 여자 분이 일어서 있었고, 그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너무나 놀란 얼굴로 그분을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다닥다닥 앉아 있던 사람들이 자리를 비켜 주며 단상까지 가는 길을 만들어 주자, 그분이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고 단상까지 걸어가는데 정상인처럼 아주 멀쩡해 보였습니다. 단상에 올라선 그분은 좋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마이크 앞에서 또박또박 얘기를 했습니다. 자기 나이는 스물일곱 살이고 인천제단 바로 아랫동네에 살고 있으며 7년 전에 허리를 심하게 다쳐 앉은뱅이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인천제단에 나오라는 권유를 받고도 계속 안 나오다가 그날 처음 왔는데, 하나님께 안수를 받고 이렇게 걷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기뻐하는 모습은 어떻게 다 설명할 수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난생처음 보는 기적에 놀랍고 신기한 한편으로, 정말 사실인지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 일행인 여자 분에게 그분이 올 때는 어떻게 왔느냐고 물어봤더니, 인천제단에 올 때만 해도 전혀 걸을 수가 없어서 어머니에게 업혀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너무도 분명한 기사이적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 후 직업군인인 남편의 발령지를 따라 강원도와 경기도 여러 곳으로 계속 옮겨 다니면서, 저는 이사 갈 때마다 제단이 어디 있는지부터 찾았습니다. 원통에서 예배드릴 때 마음이 평안하고 기뻤던 것이 항상 제 마음속에 자리 잡아 어디를 가든 제단에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러던 1965년경 남편이 강원도 화천으로 발령을 받아 저희 가족은 명월리로 이사를 가게 되었습니다. 저희 집에서 30리 정도 떨어진 사창리에 전도관이 있어서 저는 일요일마다 그곳으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습니다. 그리고 저희 집 방 한 칸을 깨끗하게 꾸며 사람들을 모아 놓고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곳에 금요일마다 사창제단 전도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릴 때면 방 한가득 사람이 모였는데, 그 후로도 계속 전도되어 사람들이 늘어나자 사창리 전도사님이 여기에도 제단을 지어야겠다고 했습니다. 마침 제가 전도한 분 중에 자기 집 밭에다 제단을 짓자고 하는 분이 있어, 여름부터 그곳에 제단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제단 바닥에 깔 자갈이 많이 필요하다고 해서 저는 교인들 여러 명과 함께 냇가에서 돌을 주워 나르는 일을 했습니다. 제단을 짓는 중에 부임해 오신 전도사님과 함께 교인들 모두 힘을 모아 아담한 시골 전도관이 세워졌습니다.

저는 매일 명월리제단에 가서 남포등을 깨끗이 닦아 놓고, 쓸고 닦으며 청소를 했습니다. 조금 높은 언덕에 세워진 제단은 그 앞에 심은 코스모스가 한창 꽃을 피워 참 예쁘고 보기 좋았습니다. 초등학교 6학년 아이들과 중학생들이 많이 전도되어 아이들 소리로 활기가 넘쳤고 어른들도 점점 늘어나 예배실을 가득 채웠습니다. 제단 가까이에는 기성교회가 하나 있었는데, 15사단(師團)에 속한 교회로 군인과 그 가족들이 주로 다니는 교회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제단 청소를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군인 세 명이 와서 자기들은 15사단 교회에 다니는데 이 교회 책임자가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그 모습이 사뭇 따지는 분위기로 무언가 심상치가 않아 보였습니다. 때마침 전도사님이 안 계셔서 제가 왜 그러시느냐고 했더니, 놀랍게도 저희 제단 밑에 폭탄이 매설되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당황스러웠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제단을 짓는 동안 그런 말 한마디도 없다가 그때야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아무래도 이상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사단 교회가 제단 옆에 있고 군용차가 매일 지나가면서 제단 짓는 것을 봤을 텐데 왜 지금에야 그런 말을 하느냐고 했습니다. 교회를 예쁘게 가꾸고 다니는 사람도 많은데 이제 와서 뜯으라는 말인가,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럴 수가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군인들은 그 말에는 대답을 피하고 말을 돌리더니 이번에는 누가 땅을 줘서 전도관을 지었느냐고 했습니다. 저는 땅 주인에게 직접 물어보라고 하며 군인들을 데리고 갔습니다. 땅을 내 준 집은 식구가 모두 제단에 나오고 아저씨만 믿지 않는 집이었는데, 군인들과 함께 가니 그 집 아저씨만 있었습니다. 군인들이 왜 땅을 줘서 전도관을 짓게 했느냐고 따져 묻자, 아저씨는 식구들이 다 믿으니 밭에 심었던 무와 고추까지 자기가 뽑아 주고 땅을 내 주었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기세등등하던 군인들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돌아갔습니다. 그 후로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폭탄 이야기는 꺼내지도 않았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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