늑대와 양

박효종 /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발행일 발행호수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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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박효종 / 서울대 윤리교육과 교수

지난 10년간 우리사회의 햇볕정책론자들은 우화에 나오는 ‘해와 나그네’처럼 북한에 대해 베풀고 지원을 하면 북한도 평화적인 자세를 유지할 것이라고 주장해왔다. 그러나 이것은 천안함폭침과 연평도 포격사건을 겪으면서 햇볕론자들의 근거없는 망상임이 드러났다.

햇볕론자들이 간과해왔던 것은 남북관계는 ‘햇님과 나그네의 관계’가 아니라 ‘늑대와 양의 관계’라는 점이다. 우리에게 친숙한 늑대와 양의 우화는 이렇다. 어느 날 늑대는 물가에서 어린양을 만난다. 그 어린양을 잡아먹을 생각이 난 늑대는 트집을 잡는다. “너, 작년 초에 나를 만났을 때 욕을 하고 도망갔지?” 겁이 난 양은 대답했다. “아니에요. 저는 그때 태어나지도 않았어요. 저는 금년에 태어났거든요.” 그러자 머쓱해진 늑대는 또다시 트집을 잡는다. “네가 물을 마시느라고 난리를 치니깐 물이 더러워지고 있어. 그러니까 나는 물을 마실 수 없잖아.” 그러자 양이 울먹이며 대답한다. “늑대님은 강물 위쪽에서 물을 마시고 있고 저는 아래쪽에서 물을 마시고 있는데, 제가 어떻게 물을 흐리게 할 수 있나요.” 낭패를 본 늑대는 드디어 본심을 털어놓는다. “말이 많구나. 나는 배가 고픈데 마침 네가 있으니 잡아먹어야겠다.” 결국 이렇게 어린양은 그동안의 구차한 해명도 소용이 없이 잡아 먹히고 말았다.

원래 남북관계는 전형적인 늑대와 양의 관계였다. 북한은 늑대고 한국은 양이었던 것이다. 또 북한이 때때로 ‘양의 탈’을 쓴 늑대였다면, 한국은 ‘늑대의 탈’을 쓰지 못하고 항상 ‘양의 탈’만 쓴 순진한 양이었다. 햇볕론자들의 잘못은 늑대가 ‘양의 탈’을 쓸 수 있다는 점을 조금도 경계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양만은 절대로 ‘늑대의 탈’을 써서는 안된다”고 막무가내로 고집한 것이다. 그 결과 한국으로 하여금 시시때때로 위협하는 북의 도발에 대하여 비굴한 유화정책으로만 일관하게 만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양에 대하여 위협을 가하는 늑대처럼 한국에 대하여 트집을 잡는 북한의 몽니를 달래기 위해 온갖 수모를 무릅쓰고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북한 인권문제가 유엔에서 논의될 때도 “북한을 자극해서는 안된다”며 침묵을 지키지 않았던가. 미얀마의 인권에 대해서는 문제를 제기하면서 그보다 더한 북한의 인권에 대해선 비굴하게 가만히 있었던 것이다. 또 북한이 싫어한다고 해서 ‘납북자’나 ‘미송환된 국군포로’ 혹은 ‘탈북자’라는 용어도 쓰지 않았다. 오로지 ‘이산가족’이라는 표현을 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북한이 싫어한다고 ‘주적’ 개념도 빼고 휴전선에서의 대북방송도 중단했다. 그런데 그런 행위의 결과가 무엇이었나. 주적개념도 뺐는데 북한은 더욱더 호전적이 되었고 북한의 인권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결과 북한주민의 인권을 억압하는 것만으로도 부족해 대한민국 국민들의 인권까지 무참히 침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삶의 터전을 잃은 연평도 주민의 참담한 상황이야말로 인권침해가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 속담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말이 있다. 이 속담은 원래 비아냥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지만, 이제는 북의 도발 후 안보에 대한 결의를 새롭게 하는 결연한 의지의 소산으로 승화시켜야 한다. 소를 잃고 나서 낭패감에 가득 차 외양간을 고치는 풀죽은 모습이 아니라 소는 잃었지만 결연한 마음으로 외양간을 고치겠다는 새로운 결심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이야말로 흐트러진 안보의식을 바로 잡아야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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