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말씀 전한 것 내 일생의 보람’ (노광자 관장)

44년 교역 생활 퇴임한 노광자 관장
발행일 발행호수 2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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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도원 전도관 시절의 노광자 관장(사진 오른쪽). 그 때는 늘 한복을 입고 다녔다.

친구들이 자신들의 출신 전도관이 공석이니 나가서 전도하여 제단 좀 부흥시켜 달라고 부탁을 하는 바람에 ‘몇 달만 나가서 열매 맺고 신앙촌에 들어오려고’ 나선 교역자의 길. 처음엔 준전도사로, 다음엔 전도사로, 시찰장으로, 관장으로 발령을 받으며 교역생활 44년을 마치고 마침내 지난 2007년 1월 2일자로 정년퇴임을 한 노광자 관장을 만나 보았다.

▶하나님께 처음 은혜 받은 때 이야기 좀 해주세요.

“청주 외덕장로교회(지금의 우암교회)를 다니면서 외국에 나가는 선교사를 꿈꾸며 신학대에 갈 마음으로 성경고등학교까지 다니며 성가대와 반사활동을 열심히 했어. 외덕교회에서 하나님을 모시고 집회를 했는데 교회를 짓다 못 지어 교회 완성하려고 목사가 하나님을 모신거여. 그 때 헌금이 말도 못하게 나왔어. 패물이 말로 나왔다고 목사가 앞에서 광고를 하더라구. 그거 다 팔아 교회 짓고도 돈이 남아 땅을 샀어. 그 집회에서 그동안 교회에서 말로만 듣고, 성경에서 글로만 보던 성신을 체험한 거여. 바람 같은 성신, 불 같은 성신, 안수가 어떤 것인지, 안찰은 어떻게 하는 것인지 직접 다 체험을 한 거지. 예배를 드리는 내내 기뻐서 집에 갈 줄 모르고 철야를 하며 기도를 하는 거여.”

목소리에서 충청도 사투리가 소박하게 묻어나는 노 관장은 그 후로 전국에서 열리는 하나님의 집회에 갔다온 사람들이 ‘기성교회엔 구원이 없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면서 교회에 안 나오자 여청년들도 교회에 안 나가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 때 잘 지어논 교회를 두고 떠나려니 마음이 좀 쓰리더라고. 이런 교회에 하나님이 안 계시면 어디 계시나 하는 마음을 갖고 아까워하며 떠났는데 다음 번 집회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다 들여다 보신 것처럼 ‘하나님의 성신은 종(그 때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칭하시며 전파하셨다)과 같이 계시지 교회와 같이 하시는 게 아니다’고 말씀을 하시는 거여.”

▶처음 발령장을 받으셨을 때를 지금 생각해보면 감회가 새로우시겠어요.

“준전도사로 청주 인근에 나가서 개척을 하고 있었는데 덕소 신앙촌이 건설된다고 언니랑 엄마가 빨리 돌아오라고 전보를 친겨. 나도 덕소로 가고 싶어서 신앙촌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도원, 문의, 품곡의 교인들이 협회에 진정서를 넣은 거야, 나를 정식 발령 내달라고.

그 때는 김풍자 사건으로 한동안 여자 교역자 발령이 취소 된 때였어. 그런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을 하셨다며 발령을 받게 된겨. 그 때가 1962년 10월 3일 충북 청원군 문의면 품곡전도관으로 신규 발령을 받았어. 지금도 그 발령장을 갖고 있어. 발령장을 받아 들고 나도 모르게 무심코 ‘끝까지 충성하게 해주시옵소서’ 외마디 기도가 나오고 감사함이 밀려오는데 그길로 소사 오만제단에 올라갔어. 낮이니까 아무도 없었지. ‘성신 나를 오라 하네~’하는 찬송을 하염없이 부르며 울었어. 죽으나 사나 하나님을 따라 가겠노라고 기도를 했지. 얼마나 울었는지 바닥에 눈물이 그득했어.”

▶교역 기간 동안 가장 뜻 깊은 곳으로 기억되는 곳은 어디세요?

“아무래도 개척지가 제일 마음이 가지. 하나님께선 50호만 있어도 개척을 하라고 하셨어. 품곡에는 주동 권사가 신앙촌에 입주한 후에 간터라 초가집에 황무지같이 형편 없는 곳이었는데 유치원을 시작하며 전도를 했어. 농촌에서 자원봉사로 애들 봐주니 고맙다고 군수까지 와서 인사를 했어. 유치원으로 아이들 모이고 어른들 호응도 좋고 1년 만에 교회를 다시 지었지.

무릉제단도 잊을 수 없는 곳인데, 풍기전도관에 시무하다 무릉에 목사 내외가 전도관으로 넘어왔다고 특명으로 그 곳으로 개척 발령을 냈는데 가보니 교회도 없는 곳이야. 처음엔 큰 방을 얻어 시작했는데 예배만 보면 사람들이 모여 들어서 교회를 지어야 겠는데, 면장 지서장 동네 이장 기성교회 목사, 심지어 무당까지 모두 합세해 교회를 못 짓게 하는데다 그 당시 그곳이 댐이 들어선다고 수몰지구로 예정돼 도저히 건축 허가가 안 나는거야.

그래도 길은 있어서 도 경찰국에 일하던 교인이 와서 ‘촌놈들이 빨갱이 아니고서는 누가 교회를 못짓게 하냐’고 야단 하니까 당장 알겠다고 하는데다가 당시에 충청북도 전체에서 하는 새마을 잔치에 무릉제단이 있는 중원군 살미면 어머니 합창단이 나가는데 지휘자가 없다는거야. 기성교회 전도사가 왔다가 시원찮다고 전도관 전도사 시키면 어떨까 말이 나오더라는 거지. 전도사님이 가서 지휘만 해주면 교회 짓는 것이 호조건이 된다는 거야, 잔치에 나가서 전도관 전도사 지휘를 잘한다고 날린겨.(웃음)

새마을 잔치 하는 동안 재빨리 공사해 지붕을 덮으라는 거야. 농가 주택으로는 허가를 내준다고 한겨. 후딱 지어 지붕을 덮었지. 개관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고, 하나님의 권능을 또 깨달았지. 그리고 그 해 영주 시찰장(도관장 바로 아래)으로 발령이 난겨.

신앙신보에 만화 그리는 최정순이 그곳 출신이고, 충주 이정숙 권사가 그 때 여청이었고, 일광교회 관장이 그 때 3-4학년 학생이었지. 내가 그랬어 ‘너희들을 건지시려고 그 손바닥 만한 제단에 나를 보내 그렇게 울게 했나보다’고.”

▶교역자에게 해주신 하나님 말씀 좀 해주세요.

“덕소시절 단에서 말씀하셨는데 전도사는 어느 제단에 가도 떠날 때는 교인들이 ‘전도사님 가지 마세요’하고 울고 불고 붙잡는 전도사가 되어야 한다고 하셨어. 스승된 자의 심판이 크다는 말씀과 교인들을 항상 내몸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늘 하셨지.”

▶후배 교역자들에게 한 말씀 해주세요.

“다른 건 없고 첫째도 인내, 둘째도 인내, 끝까지 인내심 갖고 참고 나갈 때 이루어 지더라, 참는 것이 귀하다. 견딜 수 없는 형편일 때 견디는 것, 참을 수 없는 조건일 때 참는 것, 이기지 못할 조건일 때 이기는 것, 어려움 닥칠 때 그때그때 이기는 것이 귀해.

또 하나는 내 중심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할 때는 하나님 통해주셔. 건성으로,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한다든지, 남이 하니까 따라 하는게 아니라 내 맘에서 우러나 해야 해. 진정 하나님을 위해서 사는 사람은 불평 불만이 절대 없는거야. 만사를 유익하게 하시는 하나님이시고, 어디든 계시는 하나님이시고, 언제나 주시는 하나님이시지”

노 관장은 ‘교역자 정신은 고생을 각오하고 어려워도 참고 오히려 그걸 낙으로 삼아야 하는 것이다’고 아직도 힘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44년만에 돌아온 신앙촌에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노 관장의 얼굴에는 감사함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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