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물로 아름답게 핀 시신이 많은 사람을 전도해

주채경 님(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61
글자 크기 조절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신앙신보 사진

저는 이일 성경학교에서 제 상관인 유화례 선교사에게 박 장로님 설교집을 갖다 드리고 은혜를 체험한 이야기도 전해 주었습니다. 유 선교사는 전도관에 대해 호의적이어서, 저는 장로교회에 발길을 끊은 후에도 계속 성경학교에서 근무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대화를 나누던 중에 선교사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어느 목사가 선교사를 찾아와서 제가 이단에 빠졌다고 이야기했는데, 선교사는 “내가 듣기로 박 장로님은 죄를 회개하라고 하신답니다. 그런 분이 어떻게 이단입니까?”라고 반문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후 제가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했을 때, 선교사는 무척 아쉬워하며 은혜 받은 곳으로 잘 다니라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1957년 3월에는 어머니께서 일흔두 살을 일기로 운명하시게 되었습니다. 입관하는 날 광주전도관 관장님과 교인 분들이 오셔서 찬송을 부르며 예배를 드렸는데, 시신의 피부가 뽀얗게 피어나고 조글조글하던 주름살이 펴졌을 뿐 아니라, 입술과 양 볼에 발그스름한 핏기가 감돌아 참으로 예쁘고 고왔습니다.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은 일흔두 살의 할머니 입술이 젊은 사람 입술보다 더 빨갛고 예쁘다며 놀라워했습니다. 입관을 마친 후 아름답게 핀 시신의 모습을 많은 사람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당시 광주전도관에는 김정희(現 기장신앙촌 소속)라는 여고생이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제단에 열심히 다니고 있었습니다. 하루는 정희의 큰오빠가 “아버지 말씀대로 전도관이 지탄을 받을 곳인지, 실제로 어떤 곳인지 직접 가서 알아봐야겠다.” 하며 광주전도관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저희 집에 장례가 났다는 광고를 하며 교인들에게 가 보라고 했던 것이었습니다. 정희의 큰오빠는 ‘기왕 알아보러 온 것이니 거기까지 가 보자.’ 하며 교인들을 따라 저희 집에 와서 시신을 직접 보게 되었습니다. 약사였던 그분은 ‘어떻게 죽은 사람이 이렇게 될 수 있나?’ 하며 깊은 인상을 받게 되었고, 그때부터 ‘전도관은 진실하게 믿는 곳’이라며 아버지를 적극적으로 설득하여 아버지가 더 이상 반대하지 않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정희에게 들으면서, 시신이 피는 모습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많은 사람들이 확실하게 알게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렸습니다.

그 후 같은 동네 사람들 중에 나인혜라는 분이 광주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저희 어머님이 예쁘게 핀 모습을 보고 전도되었다면서, 저에게 “나는 당신 어머님의 열매예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나인혜 씨의 네 살배기 딸이 안타깝게도 숨을 거두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관장님과 교인들이 모여서 입관예배를 드리는데, 시신이 있는 방에 시원한 바람이 감도는 것이었습니다. 바람이 들어올 곳이 전혀 없는데도 시원한 바람이 계속 불어오는 것을 거기 있던 사람들이 모두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관장님은 “성신의 바람으로 역사하여 주시니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며 기도를 드리셨습니다. 예배를 드리고 나자 아이의 얼굴이 뽀얗게 피어나고 양 볼이 꽃잎처럼 발그스름하게 물들어 한번 만져 보고 싶을 만큼 너무도 예뻤습니다. 시신을 본 사람들은 “어쩜 이렇게 예쁘니.” “쌔근쌔근 자는 것 같다.” 하며 감탄을 했습니다. 나인혜 씨는 사랑하는 딸을 보내는 가슴 아픈 순간이었지만, 곱게 핀 아이를 보면서 어느새 편안한 표정이 되었습니다. 그 후로 그분은 전도관에 더욱 열심히 다니며 신앙생활을 계속했습니다.

1957년 11월에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건설대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신앙촌에 들어가기를 고대했던 저는 건설대에 자원하여 건설 자재를 운반하는 일을 맡게 되었습니다. 난생처음 지게를 지고 하는 일이 무척이나 서툴렀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하며 그렇게 재미있고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후 저는 채소를 재배하는 농장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농장에서 일하다 보면 신앙촌 소비조합원들이 신앙촌 제품을 가지고 판매하러 나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바쁘고 활기차게 걸어가는 그분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성격이 조용해서 장사를 잘 못할 거야.’라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천부장님이 소비조합을 해 보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하셨습니다. 아무래도 용기가 나지 않아서 망설이고 있는데, 이전에 알고 지냈던 아주머니 한 분이 신앙촌 이불을 사고 싶다며 연락을 해 왔습니다. 서울 가회동에 사는 그분은 신앙촌 이불을 사고 싶어하는 사람이 많다면서 스무 명이나 소개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비로소 용기를 얻은 저는 소개받은 분들을 한 명 한 명 찾아다니며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신앙촌에서 생산하는 이불, 간장, 메리야스 등의 제품이 큰 인기를 끌어서 제가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아도 고객들이 먼저 신앙촌 제품을 찾으며 다른 사람들을 소개해 주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기계수를 놓은 수 이불은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호평을 받았는데, 주부들이 10명에서 20명씩 계를 짜서 신앙촌 이불을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공유하기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원하는 곳에 붙여넣기(Ctrl+V)해주세요.
인쇄하기
북마크추가
관련 글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