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기에

박영주 승사(2) / 광안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0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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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이어서>
그 후 1977년, 대연동제단에 다니던 막내아들 덕만이가 중학교 1학년 때 있었던 일입니다. 막내가 열이 오르고 머리가 아프다고 하기에 초량동 성분도병원에 갔더니, 장티푸스에 걸렸다며 입원을 권유했습니다. 입원 준비를 하기 위해 일단 집에 돌아왔는데 그날 밤 자던 아들이 갑자기 “악!” 하고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아들은 눈이 돌아가 흰자만 보이면서 금방이라도 어떻게 될 것 같았습니다. 다급한 마음에 아이를 데리고 동네 병원에 갔더니 여기서는 안 된다며 더 큰 병원으로 빨리 가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정신 없이 택시를 타고 성분도병원에 갔는데, 의사가 장에 출혈이 심하다며 빨리 수혈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밤새도록 수혈을 받으면 상태가 좀 나아질 거라는 의사 말과는 달리 아들은 자꾸 숨이 가빠지고 더 힘들어해서 산소 호흡기를 꽂았습니다. 의사가 계속 지켜보며 여러 가지 지시를 내리고 간호사들도 수시로 아들의 상태를 체크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들은 점점 정신을 잃고 산소 호흡기로 간신히 숨만 쉬었습니다.

다음 날 아들을 진찰한 의사는 상태가 너무 위험해서 수술도 못 하고, 다른 방법을 써 봐도 효과가 없다며 조심스럽게 이야기했습니다. 의사로서 최선을 다해 보겠지만 마음의 준비를 하라는 뜻이었습니다. 그때 아들 나이가 열네 살, 아직 피어 보지도 못했는데 이렇게 보내야 되나 하는 생각에 앞이 막막했습니다. 그래도 마지막 희망으로 생명물을 먹여 보고 싶어서 대연동제단 전도사님께 연락을 드렸더니, 작은 물병에 생명물을 담아서 가지고 오셨습니다.

저는 산소 호흡기를 잠시 떼 내고 아들 입에 생명물을 조금 넣은 후 다시 호흡기를 꽂았습니다. 그런데 몇 분 안 있어 아들이 자기 손으로 호흡기를 벗는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눈도 못 뜨고 정신도 못 차리던 아이가, 저를 보면서 “엄마, 이제 호흡기 안 해도 돼요.”라고 말을 하는데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얘가 이제 살겠구나 싶어 저는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의사는 그런 아들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상태가 좋아졌다며 수술을 해 보자고 했습니다.

몇 시간 동안의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릴 때, 저는 생명물을 솜에 축여서 아이 입술을 축여 주고 조금씩 조금씩 입에 넣어 주었습니다. 마취가 풀릴 때 무척 아프다고들 했지만 아들은 하나도 아프지 않다며 저에게 계속 찬송을 불러 달라고 했습니다.

병원에서는 수술 뒤에 물 한 모금도 먹지 못하게 했는데, 제가 생명물을 아들에게 먹여 주고 찬송을 계속 부르는 것을 어느 간호사가 보고는 “혹시 감람나무 믿으세요?”라고 물어보아서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간호사들은 제가 생명물을 먹여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작은 물병에 담긴 생명물을 아끼고 아껴 아들에게 먹여 주고 얼굴도 닦아 주었는데, 아들은 15일이라는 빠른 기간 안에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그 후로 아들이 운동을 즐기며 지금까지 건강하게 생활하는 것을 볼 때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저는 이 길을 따르는 동안 시신이 아름답게 피는 것을 셀 수 없이 많이 보았는데 그중 한 가지를 이야기할까 합니다. 1980년 용호동제단의 어느 권사님이 돌아가셨을 때였습니다. 당시 용호동제단의 부인회장이었던 제가 시신을 다루게 되어, 생명물을 입에 넣어 드리고 정성껏 씻겼습니다. 여든이 가까운 연세라 시신은 주름이 주글주글했지만 생명물로 씻긴 후에는 얼굴이 뽀얗게 피어나면서 주름살도 다 펴지고, 다홍빛 입술은 방긋이 미소를 띠고 있었습니다. 그때까지 시신이 피는 것은 많이 봤어도 그렇게 곱고 환한 시신은 처음이었습니다.

다음 날 입관을 하기로 하고, 제단에 다니지 않는 유족들에게 시신이 있는 방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말고 우는 것도 삼가 달라고 당부했습니다. 그런데 다음 날 시신을 보니 그 곱던 얼굴이 울상이 되어 잔뜩 찡그리고 있었습니다. 전날 저녁, 서울에 사는 딸이 와서는 생전에 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한 것이 속상해 한참 동안 시신을 붙들고 울었다고 했습니다. 그 딸의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토록 예쁘고 고왔던 시신이 흉하게 변한 것을 보니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우리 교인들은 계속 찬송을 부르면서 생명물을 시신에게 떠 넣어 주었습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 정성을 모아 간절히 예배를 드렸더니, 시신은 다시 뽀얗고 곱게 피어나 편안히 주무시는 듯한 모습으로 입관할 수 있었습니다.

그 후 제 나이 쉰여섯이 되던 1985년, 저는 신앙촌 물건을 판매하는 소비조합을 시작했습니다. 그때는 이미 자식들이 장성해 생계에는 걱정이 없었지만, 소비조합은 단순한 호구지책이 아니라 영과 육이 아울러 복을 받는 일임을 알기에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후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고객들을 대하면서 저의 건강을 부러워하는 사람을 자주 만나게 됩니다.

저는 그 사람들에게 소비조합을 하기 전보다 지금이 더 건강하다고 이야기해 줍니다. 올해 일흔다섯인 저의 소원은 제게 주어진 마지막 시간까지 하나님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을 따라오면서 너무도 확실하고 분명한 은혜를 체험할 수 있었기에 세상의 어떤 파도에도 요동치 않고 끝까지 참길을 따라갈 것을 다시 한 번 다짐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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