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장로님 집회에 와서 병 나은 사람들을 보니 무척 신기해

김장예 집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4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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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4년 황해도 사리원에서 태어났습니다. 4남매 중 외동딸이었던 저는 아버지가 큰 양장점을 운영하시는 유복한 환경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저희 식구 중에는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없었지만 저는 동네 친구들과 어울려 몇 년 동안 꾸준히 교회에 다녔습니다. 주일학교에서 배우는 성경 이야기가 참 재미있었는데, 성경에서 하나님 말씀대로 따랐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나도 하나님 말씀대로 바르게 살겠다고 다짐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 후 제 나이 열일곱 살 때 6·25 전쟁이 일어나면서 이남으로 피난을 내려오게 되었습니다. 잠깐만 있으면 집에 돌아가는 줄 알고 빈손으로 떠났던 저희 가족은 군산과 부산에서 피난 생활을 하며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다 몇 년 후 서울에 자리 잡고 아버지가 양장점을 운영하면서부터 형편이 차차 나아졌습니다. 전쟁 통에 중학교를 다니다 그만둔 저는 공부 대신에 봉제 기술을 배우려고 이불 만드는 공장에서 일을 했습니다.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부흥집회’가
열린다는 포스트를 보고 집회 장소인
제2운동장에 가보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어

그러던 1955년 제 나이 스물두 살 때였습니다. 같이 일하는 직원 중에 제 또래 아가씨가 신당동 중앙 장로교회에 다녔는데, 하루는 아가씨가 자기네 교회에서 부흥집회를 크게 열었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중앙교회는 건물을 새로 짓다가 자금이 모자라 중단한 상태였지만 유명한 부흥강사를 초청해 집회를 열었더니 사람들이 몰려와 교회를 짓고도 남는 헌금이 들어왔다고 했습니다. 그 부흥강사는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으로 요즈음 장로교회, 감리교회 할 것 없이 앞다퉈 그분을 모시고 부흥집회를 연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도 아가씨는 박 장로님께서 집회하시는 곳마다 열심히 쫓아다녔습니다.

이듬해인 1956년 봄에는 시내에 나갔다가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 부흥집회’ 포스터를 보게 됐습니다. 집회 장소는 서울 제2운동장이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들었던 박 장로님 이야기가 떠올라 ‘불의 사자’라고 하시는 박 장로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하기도 하고, 어릴 때 교회에 다녔던 생각이 나서 부흥집회에 참석하고 싶어졌습니다. 집회가 열리기를 고대하다가 첫날 제2운동장을 찾아가는데 왠지 기대되고 설레는 마음에 발걸음이 자꾸 빨라졌습니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박 장로님의 찬송
인도에 따라 찬송을 부르니 마음속에
근심 걱정 하나 없이 기쁨으로 충만해

운동장에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깔아 놓은 집회장에는 수많은 사람이 모여 있었습니다. 천막 끝에서 보면 어깨가 닿도록 빼곡히 앉은 사람들의 끝이 어딘지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예배 시간이 되자 키가 훤칠하시고 얼굴이 환하게 빛나는 신사 분이 단상으로 올라오셨는데 그분이 박태선 장로님이라고 했습니다.

설교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말씀하시기를,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마음속의 때를 씻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배당에 다니며 오래 믿었다고 해서 구원을 얻는 것이 아니라 성신으로 모든 죄를 씻어 마음의 성결함을 이룬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기성교회의 신학(神學)은 전부 성신을 모르는 인위적인 인학(人學)이라고 하시며 ‘성신을 받고 성신의 가르침을 아는 것이 진정한 신학’이라는 말씀에 저도 모르게 무릎을 쳤습니다. 그 말씀이 참 분명하고 명쾌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교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성신으로 모든 죄를 씻어
마음의 성결함을 이룬 자만이 천국에 갈 수 있다. 성신을 받고 성신의 가르침을
아는 것이 진정한 신학`이라고 하신 분명하고 명쾌한 말씀을 듣고 무릎을 쳐

말씀에 열중하는 동안 어느새 설교 시간이 지나고 박 장로님께서는 찬송을 인도하셨습니다. “달고 오묘한 그 말씀 생명의 말씀은∼” 하는 찬송을 따라 부르면서 저는 찬송가 가사처럼 귀한 생명의 말씀을 가르쳐 주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한 가지 찬송을 반복해서 인도하셨는데, 같은 찬송을 수십 번 연거푸 부르다 보면 가사의 뜻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힘차게 손뼉을 치며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하는 찬송을 부를 때는 마음속에 근심 걱정 하나 없이 기쁨으로 충만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제일 갖고 싶어 했던 예쁜 옷을 가졌을 때보다, 돈을 모아 값비싼 금팔찌를 샀을 때보다 비교할 수 없이 기분이 좋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기쁨을 주시는구나.’ 하며 저도 모르게 연신 웃음이 나왔습니다.

하루하루 집회가 계속될수록 많은 사람이 몰려와서 일주일 예정이었던 집회는 열흘로 연장되었습니다. 집회 중 어느 날은 사회부 장관을 지냈던 최창순 박사가 등단해서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고 병이 나은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최창순 박사는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가 세 동강으로 부러졌을 때 박 장로님께 안찰을 받고 부러진 흔적도 없이 다리가 붙었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집회 도중에 박 장로님께서 “병 나은 자는 일어나라!” 하고 외치시면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손을 들고 일어났습니다. 앉은뱅이가 일어설 수 있게 됐다고 소리치며 그 자리에서 걸어 보기도 하고, 벙어리가 말문이 열려 말을 하게 됐다며 어눌한 말투로 “엄-마-”를 부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박 장로님 집회에 와서 병이 나았다고 하는 것이 참 신기했는데 저도 그런 체험을 하게 됐습니다.

`병나은 자 일어나라`고 외치시자
앉은뱅이가 일어설 수 있게 됐다며
그 자리에서 걸어보기도 하고
벙어리는 말문이 트여 말을 하기도

집회에 참석할 당시 저는 심한 두통을 앓고 있었습니다. 해 뜰 무렵이면 어김없이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가 낮이 되어서야 겨우 가라앉곤 했습니다. 통증이 너무 심해지면 한의원에서 침을 맞긴 했지만 임시방편일 뿐 근본적인 치료가 되지 못했고, 아침이면 머리에 끈을 동여매고 끙끙 앓는 저 때문에 어머니는 항상 근심스러워하셨습니다. 그런데 박 장로님 집회에서 철야를 하고 아침이 되어도 머리가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해 뜨는 시간에도 머리가 개운하고 상쾌해서 언제 두통이 있었나 싶을 정도였습니다. 저는 집회 기간 동안 새벽예배를 마친 후 집에 가서 아침밥을 먹고 왔는데, 머리가 하나도 아프지 않고 오히려 몸이 가뿐하게 느껴져서 가벼운 걸음으로 다녀오곤 했습니다.

(김장예 집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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