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의인이 한국 땅에 나셨으니 참으로 복이구나

백정환 권사(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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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3년 황해도 장연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어렸을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장로교회에 다녔던 저는 종교 서적을 자주 읽으며 장래에 목사가 될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족은 6?25 전쟁 때 이남으로 내려와 서울에 정착했는데, 저는 낮에 미군부대에서 일하고 밤에는 고등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리고 장로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신학대학에 가기 위해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던 1955년이었습니다. 어머니(故 박음전 권사)가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의 부흥집회에 다녀오신 후부터 그분의 집회가 열리는 곳마다 열심히 참석하면서 동생들까지 데리고 다니셨습니다. 어머니는 저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유하셨으나 저는 집회에 갈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습니다. 오히려 가족들이 집회에 참석하는 동안 저 혼자서 도시락을 싸고 교복을 빨아 입어야 했기 때문에 저로서는 몹시 불편했습니다. 박 장로님 집회에 한 번도 참석하지 않았던 저는 가족들이 집회에 다녀온 후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동생들은 “박 장로님 집회에서 병자들이 낫는 것을 봤다.” 하며 저에게 열심히 이야기했지만 저는 무심코 흘려버린 채 귀담아듣지 않았고 공연히 동생들에게 짜증을 내기도 했습니다.

박장로님 집회에 다녀온 가족들이
기뻐 어쩔 줄을 몰라하는 것을 보고 처음엔 이해가 안돼
내게 함께 가기를 권유해도 오히려 짜증을 내

그러던 1955년 10월경이었습니다. 제가 미군부대에서 스토브를 만지다 실수하여 얼굴에 화상을 입게 되었는데,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집에서 쉬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동안 어머니의 간곡한 권유를 듣지 않고 박 장로님 집회에 가지 않았던 것이 가장 마음에 걸렸으며 동생들에게 짜증을 냈던 것도 미안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가족들 마음을 많이 아프게 했구나.’ 하며 가족들이 박 장로님 집회에 가자고 간곡하게 이야기하던 모습이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하루는 저와 친분이 있던 이 선생이라는 분이 병문안을 왔습니다. 그분은 제가 다니는 양남동 장로교회에서 학생회장을 맡고 있었는데, 자신이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했던 일을 이야기하며 그 집회에서 병자들이 낫는 놀라운 기적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당시 양남동교회 목사는 ‘박태선 장로는 이단이며 안찰은 사람들을 속이는 술수’라고 했으나, 이 선생은 절대 그렇지 않다며 “박 장로님은 이전에 보지 못했던 훌륭하신 부흥사”라고 하면서 자신은 박 장로님께 안수도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원효로 박 장로님 댁에 기도처가 있는데 거기에 사람들이 모여서 예배를 드린다네.” 하며 저에게 생각이 있으면 한번 가 보라고 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저는 12월경에 처음으로 원효로의 기도처를 찾아가게 되었고, 그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가끔씩 원효로 기도처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1956년 1월 1일 새벽예배를 마친 후에는 박 장로님께서 참석자들에게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차례로 줄을 서서 안찰을 받았는데, 제 앞에는 양남동교회에서 청년회장을 했던 주 선생이라는 분이 안찰을 받았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배에 살짝 손을 얹으실 뿐인데도 그분은 몹시 고통스러워하며 몸을 뒤틀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저는 ‘나도 저렇게 되는 것 아닌가? 안찰을 받지 말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곧바로 제 차례가 되어 할 수 없이 박 장로님 앞에 갔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안찰해 주시며 “이런 마음을 가지고 무슨 하나님을 믿었다고 그래? 하나님을 믿으려면 나 자신을 빼 버려야 된다.” 하셨습니다. 그 간단한 말씀이 제 마음에 큰 자극을 주었으며 ‘자존심이 강한 내 성격이 신앙에 걸림돌이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만제단 개관예배때 하나님께서 찬송을 인도하시며 찬송가 받침대를 들어
단을 치시자 그때마다 하얀 구름 같은 것이 퍼져나와 사람들에게 내려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감람나무가 내리시는 이슬성신이구나!’하고 생각

그 후로 저는 원효로 구제단에 계속 다니게 되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리러 가는 길에 입속으로 찬송을 부르면 발걸음이 아주 가볍게 느껴졌으며, 눈물이 없었던 제가 제단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설교 시간의 주된 말씀은 성경상의 ‘동방의 의인’과 ‘감람나무’에 대한 말씀이었습니다. 호세아서 14장을 풀어 주시며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자가 바로 감람나무’라고 하셨습니다. 또한 이사야서 41장에 기록된 ‘동방의 일인’이 한국 땅에 나타난다고 하시면서 “동방의 일인이 바로 나”라고 하셨습니다. 당시 저는 전쟁을 겪고 우리나라가 폐허가 된 모습에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들으면서 ‘동방의 일인이 한국 땅에 나타나셨으니 참으로 복이다. 우리나라가 어려움을 극복하고 일어설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원효로 구제단에 계속 다니며 감람나무께서 은혜를 주시고 구원으로 이끌어 주시는 존재임을 깨달을 수 있었고, 이 길을 꼭 따라가야겠다고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그해 여름에는 서울 청암동에 이만제단을 건설하면서 건설을 도울 청년들을 모집한다고 광고를 했습니다. 그 광고를 들으며 ‘나도 꼭 참여해야겠다.’라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전을 짓는 일이 다른 어떤 일보다 귀하고 보람된 일이며 이 일에 꼭 동참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건설에 자원하여 동료들과 같이 땅을 파고 돌을 고르면서 일을 도왔습니다. 한강을 굽어보는 언덕에 아름다운 제단이 차츰차츰 올라가는 것을 보면서 그렇게 기쁘고 좋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침저녁으로 건설 현장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 주셨으며 지방 순회를 가실 때는 저녁에 오지 못하셔도 아침에 꼭 들르셨습니다. 그때 일하는 사람들에게 따뜻하게 격려해 주시던 하나님의 모습이 제 가슴속에 소중하게 남아 있습니다.

생명물의 권능을 전해 듣고 폐병으로 고생하는 친구에게 권해
친구는 생명물을 마신 후 각혈까지 하던 병이 씻은 듯이 나아

이듬해인 1957년 4월 이만제단이 완공되어 개관집회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찬송을 인도하시며 찬송가를 놓는 받침대를 힘 있게 치셨는데, 그렇게 치실 때마다 하얀 구름 같은 것이 퍼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뽀얀 것은 마치 가을 하늘에 떠다니는 뭉게구름 같았으며 단상에서부터 쭉 퍼져 나와 사람들에게 내렸습니다. 저는 “감람나무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신다.”라고 들었던 설교 말씀이 떠오르며 ‘아! 이것이 말로만 듣던 이슬은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만제단에서 생명물을 축복해 주시며 “생명물을 죽은 사람의 입에 넣어 주면 여느 물과 다르게 흘러나오는 것 없이 그대로 넘어가며 그 시신이 아름답게 핀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면서 기성교회에 다닐 때 가깝게 지냈던 친구가 떠올랐습니다. 폐병으로 고생하는 그 친구가 생명물을 마시면 낫지 않을까 하고 생각한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저는 생명물을 한 병 가지고 친구의 집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 물은 감람나무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이며 네 병이 회복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가져왔다고 했더니 친구는 생명물을 마셔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둘이서 한참 동안 찬송을 부른 후에 친구는 생명물을 마셨는데, 그다음 주부터 친구가 스스로 이만제단에 찾아와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각혈을 할 정도로 병세가 심각했던 친구는 생명물을 마신 후 씻은 듯이 나아서 완전히 건강을 되찾았으며 이후 이만제단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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