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소신앙촌(10) – 생필품에서 제철까지⑦

'산진수회의 명승지에 시온경제권' - 한국일보, 서울신문 등 앞 다투어 덕소신앙촌 보도
발행일 발행호수 2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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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60년대 덕소신앙촌의 모습.

1963년 5월 7일자 한국일보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한강 둔덕의 20만 평 터전에 차려놓은 「제2신앙촌」은 착공 10개월 만에 벌써 서울의 위성도시처럼 그 규모가 틀이 잡혀졌다.
 
작년 7월 박 장로가 ‘자유율법을 지키기 위한 두번째 울타리’로 세웠다는 이곳은 이제 소사의 ‘제1신앙촌’을 능가하는 ‘시온경제권’을 이루고 있다.
 
호화선박도 건조
 
1만 평의 생필품 공장지대, 2만 평의 중공업지대와 5만 평의 ‘매머드’주택단지로 구성된 이 ‘제2신앙촌’에선 시온캐러멜, 카스텔라, 빵 등의 제과류, 간장, 된장 등의 장유류, 60대의 대환기(臺丸機)와 미싱 45대의 설비로 월간 약 20만 장(여름철)을 생산한다는메리야스, 모직물, 양말로부터 선반, 주물의 정밀기계, 심지어 콜라, 사이다, 피아노, 바이올린 등 각종 악기에 이르기까지 폭 넓은 상품을 만들어 내고 있으며, 또 월간 5백 톤 이상을 생산한다는 제철 제강 공장을 건설 중에 있다.
 
종업원만 하더라도 1천 2백여 명, 이들은 숙련공과 견습공으로 나누어져 있다.
 
모두가 신도인 4천여 명의 ‘제2신앙촌’주민은 A, B, C, D동으로 나누어 있는 주택과 4개의 아파트에 살며 거의 휴식을 잊어버린 것처럼 부지런히 일하고 있어 4백 50평의 ‘임시 덕소제단’ 7백여 명이 하룻밤 사이에 지어버릴 만큼 놀라울 만한 건설력을 갖고 있다.”
 
또 1964년 9월 5일자 서울신문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서울서 약 50리, 버스로 40분가량 달리면 팔당 못 미쳐 덕소라는 곳이 있다. 금산(金山) 미봉(未峰)의 지진두(地盡頭)에 위치하고 안하(眼下)에 한강을 둔 산진수회(山盡水廻)의 지리적 형승(形勝)을 가진 명승지이기도 하다.
 
`생필품 공장, 중공업, 주택단지로 구성
더욱 볼만한 것은 강괴생상 제강공장`
 
여기에 62년 7월 20일 새로운 이상촌(理想村)의 씨가 뿌려졌으니 이것이 바로 제2신앙촌인 것이다. 불과 100일의 단시일에 8백 세대를 수용하는 현대식 2층 양옥과 아파트 등 주택가가 이룩되었고, 제강, 철공, 제과, 메리야스, 편물, 장유 공장을 비롯한 30여 공장이 건설되었다. 더욱 볼만한 것은 연산(年産) 2만 톤의 강괴(鋼塊)를 생산하는 제강 공장이다.
 
현장 감독은 앞으로 3만 5천kw의 용량을 가지는 제강 공장으로 확충할 계획이라 한다. 기계류와 부속품은 자체 철공장에서 제조되고 있다. 정밀 기계를 손질하는 여자들의 모습이 이채로웠고, 남녀의 구별 없이 취업하고 있다.
 
외국 영화에서 볼 수 있는 형의 호화선이 완공을 서두르고 있었다. 1백 톤의 대형 철선이 늦어도 9월 하순에는 한강을 운행하게 되는데 덕소와 서울간을 정기적으로 왕복한다는 것이다. 육로 교통의 번잡을 피하는 이기(利器)이라고도 하면서 한강의 명물이 될 것이라 한다. 앞으로 덕소에 올 때는 꼭 이 배를 이용해 달라는 그곳 신자들의 부탁이다.
 
그들은 이밖에도 동양 제일의 4천 5백 평의 예배당 건축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스라엘을 비롯한 외국에도 이 같은 종교적 집단체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 있는 신앙촌처럼 현대적인 것은 볼 수 없는 실정이다. 이들은 말하기를 전도의 목적이니 관광객은 대 환영이라는 것이다. 이날에도 수많은 관광객들이 덕소의 주택가며 공장 지대에 안내를 받고 구경하고 있음을 목격했다.”
 
침체 아닌 내적 충실
 
1970년 9월 27일자 주간조선은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세상엔 억측도 많다. 그러나 박태선 장로와 그를 따르는 1백만 신도가 함께 이룩한 소위 신앙촌 만큼 구구한 억측을 자아내는 대상도 드물다. 그것은 그 만큼 신앙촌의 내막이 별로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신앙촌이 이제껏 터놓고 공개가 안 된 이면에는 그들 자신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데도 그 원인이 있지만 엄밀히 따지면 으레 ‘금단의 성역’이려니 하고, 알릴 의무를 스스로 게을리한 언론 편에 더 큰 책임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저러나 덕소 한강변에 자리 잡은 제2신앙촌을 지나노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가 보고 싶은 호기심을 갖게 될 것이다. 밤이라면 그 휘황한 불빛의 불야성에 놀랄 것이고 낮이라면 그 엄청난 규모에 더욱 감탄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정부 고위층과 장기영씨(한국일보사장)를 비롯한 숱한 사회 저명인사 및 각 대학단체 등이 신앙촌을 방문했으니 신앙촌은 금단의 지역이란 일반의 인식은 아무래도 잘못되었던 것같다. 사실 요즘도 매일 1백 명 정도(면회자 포함)의 일반 방문객이 신앙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주말 신앙촌을 방문한 기자도 예외는 아니다. 박 장로의 영어(囹圄)생활 등 한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신앙촌은 요즘 일반의 관심에서 사라질 정도로 조용하기만 하다. 그러나 이 같은 신앙촌의 침묵은 곧 침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신앙촌의 내적 충실을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보다 크고 보다 나은 새로운 제3신앙촌 신설을 앞두고 전열을 다시 가다듬고 있다는 증거라고도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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