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소신앙촌(11) – 생필품에서 제철까지⑧

교세가 나날이 발전하자 기성교계가 총동원해 신앙촌에 큰 시련을 안겨줬다
발행일 발행호수 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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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960년대 각 언론들은 앞다투어 덕소신앙촌에 대한 대대적인 보도를 하였다.

1970년 주간조선의 신앙촌에 대한 보도는 계속된다.

“한때 기독교 기성교단들은 박 장로를 이단자로 몰았으나 그는 조금도 굴하지 않고 초교파적인 신앙운동을 이끌었으며  국민자주경제의 슬로건을 내걸고 신앙촌을 건설해 왔다. 이제 그는 시온경제권의 총수로서 그리고 백만 신도를 거느린 거물급 종교 지도자로서 성장했다.”

주간조선은 하나님의 존재에 관하여 단순한 부흥사가 아니라 성경에 예언돼 있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박태선 장로는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55년 봄 서울 남산에서 1주일간 가졌던 남산 대부흥집회로부터 시작하여 기성 기독교계에 반기를 들고 오늘의 신앙촌을 건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것은 부흥회에서 자신을 얻은 박 장로의 즉흥적인 생각은 아니었다. 이사야서를 비롯한 모든 예언서(豫言書)들이 영광스러운 나라, 천하만국을 통치할 나라의 지상건설을 예언한 데에 근거한 것이다.”

주간조선은 하나님의 권능으로 사람들이 구름같이 모이게 되는 과정과 이에 당황한 기성교단의 반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썼다.

“그 후 그는 전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부흥회를 열어 선풍적 인기를 끌었다. 박장로가 가는 곳 마다 숱한 신도들이 모여들었다. 그의 권능의 설교와 안찰기도, 그리고 그의 기도를 거친 생수를 통해 때때로 보여주는 이적들은 신도들을 이끌기에 충분했다. 기성교회 목사들까지도 동조하는 이가 많았다.

이에 당황한 기성교단에서는 박 장로를 이단자로 규정하고 그에게 동조하는 목사들에게는 제재를 가하기로 방침을 세웠다. 이에 박 장로는 하루아침에 발붙일 곳이 없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꺼질 줄을 몰랐다. 그의 집회를 이미 경험한 일반 신도들도 열렬히 그를 따랐다.”

주간조선은 천부교회의 탄생, 즉 원효로 구제단에서 80명으로 시작하여 신앙촌을 건설하게 되기까지의 부흥상을 다음과 같이 소개하였다.

“박 장로는 원효로 종점 그의 집에서 80여 명의 신도와 더불어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그는 기성교회는 이미 썩었으므로 은혜를 받을 수 없고 자신이 이끄는 신앙촌에 들어와 자유율법을 지켜야만 은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어쨌든 교세가 날로 확장되자 57년 11월 17일 오랫동안 꿈꿔오던 신앙촌을 마침내 경기도 부천군 소사읍의 1백 만 평에 달하는 황무지에 건설하게 되었다. 남산에서 첫 집회를 가진지 2년 6개월만의 일이었다. 날이 갈수록 신도들은 신앙촌으로 몰려들었다. 신앙촌에 대한 음해와 모략도 일어났다. 그러나 치밀한 조직과 운영으로 신앙촌은 나날이 발전해 갔다.

또한 신도들의 생활대책과 종교적 전도를 위해 세운 소규모의 각종 기업은 신도들이 직영하는 신앙촌 특유의 독점판매 방식에 의해 크게 번창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이미 신앙촌의 제품은 품질이 좋기로 평판이 났다.

그 뒤 3년이 채 못 되어 전국적으로 70만의 신도와 1천 여 개소의 전도관을 헤아리게 되었다. 놀라운 발전이었다.”

이어서 주간조선은 신앙촌의 발전을 음해하고 핍박하는 기성교회 세력들에 의해 당하신 하나님의 옥고를 다음과 같이 보도 했다.

`그러나 신앙촌의 발전이 그렇게 순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2년 6개월에 걸친 박 장로의 영어생활이 그것을 말해준다. 처음에 죄목은 사기, 상해, 중감금 이었지만 뒤에 3·15 부정선거관련자처벌법 위반혐의로 바뀌었다. 이 사건은 박 장로 자신이나 신앙촌으로서는 일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오히려 그들은 이것을 선지자의 수난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어쨌든 62년 1월, 그가 풀려 나오기까지의 2년 6개월이 신앙촌으로서는 최대의 시련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박장로를 잃은 신앙촌의 독신자(篤信者)들은 비록 한때 실의에 잠기기는 했지만 끝까지 잘 참고 기다렸다.

자유의 몸이 된 박 장로는 곧 이어 보다 근대적인 규모와 문화 시설을 갖춘 새로운 신앙촌 건설에 착수했다. 경기도 양주군 덕소리에 50만 평의 땅을 매입, 제2의 신앙촌 건설에 박차를 가한 것이다. 실로 그가 출감한지 한 달 뒤의 일이다. 전체 부지를 주택지대, 산업시설 및 제철 공업지대의 셋으로 나눴다. 특히 제철공업은 그가 평생에 이뤄보려는 사업 중의 하나였다. 그 후 박 장로는 소사에서 옮겨온 신도들과 더불어 제2의 신앙촌 건설에 주력, 주택을 비롯한 방대한 규모의 각종 시설을 불과 3개월 만에 완성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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