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수 관장 편 ④ 문맹이던 할머니가 눈을 떠 글을 읽게 되다

문맹이던 할머니가 눈을 떠 글을 읽게 되다
발행일 발행호수 2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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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1. 1977년 김제전도관 시무할 때의 심 관장. 2. 현재의 일광파출소 모습

4. 기성교회 종소리는 놔두고 전도관 음악종 시비

제가 일광교회에 시무할 때였습니다. 요즈음도 그렇지만 천부교에서는 새벽예배를 드리기 전 음악종을 울립니다. 저도 매일 새벽 하루도 빠짐없이 정한 시간에 음악종을 울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파출소에서 좀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파출소에 가보니 새벽마다 치는 전도관 음악종 소리 때문에 업무에 지장이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체육대회 이후 전도관에 아이들이 많이 전도되니까 전도관을 시기하는 누군가가 신고를 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파출소 경찰관은 대뜸 “음악종 때문에 우리도 업무에 지장이 있고 주변 주민들도 시끄럽다고 하니 앞으로 음악종을 치지 마시오”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말들 들은 저는 “기성교회도 새벽마다 댕그렁 댕그렁 종을 치는데 그건 아무 말도 안 하고, 우리는 그것보다 더 부드럽고 아름다운 음악종을 치는데 그걸 장려하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하지 말라고 하니 말이 됩니까? 다음에 이 일로 날 부를 때는 일광에 있는 기성교회 목사들도 같이 불러야 오지 안 그러면 안 오겠소. 그리고 당신의 이름과 계급 좀 알려주시오.” 저는 시종일관 딱딱한 말투로 말하는 그 경찰관의 이름과 계급을 종이에 써 달라고 했습니다. 왜 그러느냐고 의아해하는 경찰관에게 저는 기성교회의 사주를 받고 음악종을 울리지 못하게 하는 이 경찰관의 편파적 행위를 혼내주기 위해서는 좀 편법을 써야겠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음악종을 치는 것은 ‘새벽종이 울렸네. 새아침이 밝았네’라는 새마을운동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인데, 당신이 음악종을 치지 말라고 하니 새마을운동을 반대하는 것 아니오? 청와대에 새마을운동을 반대한다고 보고를 하겠으니 당신의 이름과 계급을 알려주시오”라고 했습니다.

과연 그 말을 들은 경찰관은 깜짝 놀라며 없던 일로 하겠다면서 그냥 가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기장전도관에서도 같은 일이 있었는데 기장전도관은 파출소에 다녀온 후 벌금을 내라고 해서 벌금을 냈다고 합니다. 세상에 기성교회의 듣기싫은 땡땡 종소리는 놔두고 음악종을 울린다고 벌금을 내라하다니, 기성교회의 방해 공작은 이처럼 집요했던 것입니다.

부산 기장군 장안읍 고리에 고리원자력발전소가 건설될 때였습니다. 당시 해운대에서 고리까지 포장된 길은 하나도 없었고 집들도 모두 낡았는데 박정희 대통령이 고리원전 건설현장을 시찰하기 위해 오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일광면에서는 박대통령이 지나는 길에 보이는 낡은 집들을 페인트로 깨끗하게 칠하는 작업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을에서 가장 잘 보이는 건물은 그 일대에서 가장 큰 건물인 일광전도관이었습니다. 전도관 앞에는 건물도 없었고 전부 논, 밭이었기 때문에 더욱 잘 보였습니다.

기성교회의 사주를 받고 괴롭히는
파출소 경찰관이 얄미워
`당신이 새마을운동 무시하니
청와대에 고해야겠다` 호통치니
경찰관이 혼비백산, `없던 일로 합시다`

어느 날 일광면에서 나온 면직원이 “박대통령님이 오시니까 새마을 운동과 관련 있는 오렌지색, 초록색, 청색 이 세 가지 색깔 중 하나를 지붕 위에 칠해야합니다”는 말을 했다고 교인으로부터 전해 듣고 저는 면사무소로 갔습니다. “교회 지붕을 칠하라고 하신 분이 누구십니까?” 제 말을 듣고 부면장이 나왔습니다. “네. 접니다. 그 교회만 그러는 것이 아니라 그 주변 집과 건물은 다 칠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럼 페인트를 사서 교회로 가져다주십시오. 부면장님은 여기가 고향이지만 저는 객지 사람이라 여기 상점 주인들을 잘 모릅니다. 부면장님께서 아는 상인을 통해 제단 평수에 맞춰서 페인트를 싸게 구입해 주시면 제가 부면장님께 페인트 값을 지불하겠습니다.” 가만히 듣고 있던 부면장은 저의 제안에 그렇게 하겠노라 약속을 했습니다. 며칠 후 오렌지색 페인트가 배달되어 왔습니다. 저는 교인들과 오렌지색 페인트를 일광전도관 지붕에 칠했습니다. 그리고 약속대로 부면장님께 페인트 값을 보내드렸더니 고맙다고 하였습니다. 하얗고 깨끗한 전도관 건물에 오렌지색으로 지붕을 칠해놓으니 멀리서도 일광전도관이 산뜻해보였습니다.

일광전도관에는 며느리와 함께 교회에 나오던 이준희 할머니라는 분이 계셨습니다. 그 분 아들은 당시 동성판 유리공장에 다녔는데 모두가 먹고 살기 어려운 시절이었지만 좋은 회사에 다니는 아들 덕분에 할머니의 생활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늘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할머니가 문맹이라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찬송을 맘껏 부르고 싶어도 글을 읽을 줄 모르니 찬송가를 볼 수도 없고, 거기에 귀까지 어두워 찬송을 부를 때도 겨우 듣고 따라 부를 정도였습니다. 당시엔 보청기가 비싸서 보통 서민들은 살 엄두도 못 낼 때였습니다. 글도 모르고 잘 들리지도 않으니 이준희 할머니는 설교 시간에 성경 구절을 말해도 가만히 있고 성경을 찾질 못했습니다. 그래도 할머니는 새벽예배만큼은 빠지지 않았습니다. 새벽예배를 드릴 때면 보는 사람까지 애절함이 느껴질 정도로 가슴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새벽예배를 마치고 이준희 할머니가 “관장님, 저 글 읽을 줄 알아요”하는 것이었습니다. “예? 글을 읽으신다고요? 어떻게 그런 일이?” 놀란 저는 이준희 할머니께 글을 읽어보시라고 했습니다. 이준희 할머니는 찬송가를 폈습니다. 그리고 찬송가 가사를 읽어 내려갔습니다. 혹시 예전에 찬송을 불렀던 기억으로 읽는 것은 아닌가 하여 성경책을 펴 보였습니다. 그 책도 역시 더듬더듬 잘 읽었습니다. ‘한글을 따로 배운 것도 아닌데 글을 읽게 되다니!’ 이 모습을 본 저는 마치 벙어리가 말을 하는 것처럼 매우 신기하고 놀라웠습니다. 저는 매일 새벽마다 하나님께 울부짖고 기도드린 이준희 할머니에게 하나님께서 크신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초창기 천막집회 때 하나님의 권능으로 벙어리가 찬송을 하던 일을 기억했습니다.

얼마 후 할머니의 칠순잔치가 있었습니다. 저도 칠순잔치에 초대를 받아 교인들과 함께 갔습니다. 할머니 아들은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던 어머니가 글까지 읽게 됐다며 우리들에게 무척 고마워했습니다. 저는 할머니 아들에게 “어머님은 칠순 잔치보다 보청기가 더 필요하신 것 같다”고 귀띔해 주었습니다. 얼마 후 보청기를 끼게 된 이준희 할머니는 더 잘 듣고 잘 읽게 되어 즐거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후 저는 1977년 3월 4일 전라북도 김제전도관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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