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광수 관장 편 ② ‘갈현리의 모든 사람을 전도 해야지’
2. '갈현리의 모든 사람을 전도 해야지'소사신앙촌에 입주한 지 두 달이 지난 어느 날이었습니다. 새벽예배를 마치고 관장님께서 다음과 같이 광고를 하셨습니다. “심광수씨 오셨으면 예배 마치고 제자리에 남아주세요.” 강원도에서 이사 온 지 얼마 안 되는 나를 아는 사람이 없을텐데 무슨 일일까 생각하면서 남았습니다. 관장님께서는 제게 오시더니 “심광수씨가 기장신앙촌 부흥협회(이하 협회) 직원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협회에는 조성면 전도사님이 계셨는데 조전도사님은 협회에 직원이 부족하자 전부터 알고 있던 저를 추천하였고, 제가 소사신앙촌에 입주했다는 소식을 듣고 관장님께 연락을 했던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족들 때문에 잠시 고민이 되었지만 다시는 안 올 기회라는 생각이 들어 가족을 소사신앙촌에 두고 협회가 있는 기장신앙촌에 가기로 결정 하고 1973년 11월 27일 축복일에 가서 하나님께 눈안찰을 받았습니다.
축복캐러멜을 가지고
협회에서 근무를 하던 어느 날 소사신앙촌 백부장(신앙촌 주민의 업무를 보는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습니다. 가족들이 많이 아프니 빨리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협회 주도남간사님께 말씀을 드리고 소사신앙촌으로 향했습니다. 급히 가느라 다른 것은 준비할 형편이 안 되어 새벽예배 때 하나님께 축복 받은 캐러멜 10개짜리 두통을 가지고 갔습니다. 당시에는 아픈 사람이 축복캐러멜을 먹거나 녹여서 아픈 곳에 바르면 병이 나았습니다.
도착하자마자 저는 축복받은 캐러멜을 가지고 황급히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집사람은 아파서 누워있었고 막내아들은 뜨거운 국 냄비를 엎어서 가슴과 배에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아파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던 집사람이 갑자기 몸이 괜찮아졌다며 자리를 털고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축복받은 캐러멜을 가지고 들어가자마자 병이 나은 집사람을 보고 놀란 저는 일단 안심을 하고 막내에게 캐러멜을 녹여 화상 입은 곳에 발라주었습니다. 몇 번 발라주니 아이의 화상은 감쪽같이 나았습니다.
아파서 일어나 앉지도
못하던 사람 축복캐러멜
가지고 들어가자 마자
바로 병이 나아 완쾌
기장신앙촌에 돌아온 저는 가족들을 데리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후 다시 소사신앙촌에 가서 트럭에 짐을 싣고 소사신앙촌 백부 에 가서 기장으로 가겠다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런데 백부에서 말하기를 소사신앙촌에서 기장신앙촌으로 바로 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당시에는 신앙과 생활면에서 어느 정도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 소사신앙촌에서 덕소신앙촌으로 갈 수 있었고 또 덕소에서 모범이 되는 사람들이 기장신앙촌에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할 수 없이 1974년 3월 22일 경기도 양주군 와부읍 덕소리 528번지 덕소신앙촌 8아파트 54호에 가족들을 입주시키고 혼자 기장신앙촌으로 왔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덕소신앙촌 백부에 말씀을 드려 가족들을 기장으로 데리고 올 수 있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당시 기장신앙촌에는 종업원 숙소 외에 주택은 부족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족들과 함께 살림을 하는 사람들은 기장신앙촌 주변 죽성리, 신천리에 집을 세내어 살았습니다. 저도 죽성리나 신천리에 집을 얻고 싶었지만 그곳엔 먼저 온 사람들로 꽉 차서 할 수 없이 학리에 집을 얻었습니다. 학리는 신앙촌에서 좀 떨어진 곳이었기 때문에 교인들도 몇 명 없었습니다. 협회에서는 새벽예배나 출퇴근이 불편한 곳에 집을 얻었다고 걱정했지만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새벽예배를 빠지는 일은 없었습니다.
1974년 10월이었습니다. 협회에서 근무를 하고 있는데 급히 집으로 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그땐 집집마다 연탄을 땔 때였는데 막내가 연탄아궁이에 빠지는 사고가 났다는 것입니다. 집사람이 물을 길으러 나간 사이 막내의 자지러지는 소리에 도로 달려와 아이를 꺼냈지만 이미 막내의 무릎과 발은 심각하게 화상을 입은 상태였습니다.
연탄아궁이에 빠져
심각한 화상 입은 막내
생명물로 한 달만에 나아
안 믿는 이웃들 다 놀라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경황이 없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기장신앙촌 의무실로 달려가 아이의 무릎과 발에 생명물을 발라주었습니다. 집사람은 병원에 가야하는 것 아니냐고 했지만 하루에 아침, 저녁으로 두 번씩 계속 의무실에 다니면서 생명물로 치료를 했습니다. 아이의 고통은 생명물을 바를수록 점점 줄어들었고 한달이 지나자 아이는 언제 아팠냐는 듯 싹 나았습니다. 이웃들은 아이가 화상을 입어 인간 구실 하긴 틀렸다고 생각했는데 한달만에 생명물로 완치된 것을 보고 학리의 안 믿는 주민들은 무척 신기하고 놀라워했습니다.
신학원에 가다
기장신앙촌 주변 죽성리, 기장, 일광에 각각 전도관이 세워졌고 이후에 제가 사는 학리에도 전도관이 생겼습니다. 그때 일광전도관에는 김성 관장님이 계셨는데 김관장님은 제게 협회에서 근무하더라도 전도사 경험이 있는 게 좋다고 했습니다. 얼마 후 김관장님은 하나님께 전화로 “심광수를 전도사로 보내주셨으면 좋겠습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잠시 생각을 하신 하나님께서는 저를 신학원에 보내라고 하셨고 저는 곧장 1975년 1월 12일 서울 신설동 3중앙에 있는 신학원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신학원에서는 체계말씀, 성경, 찬송 등을 배우고 각 교회에 나가 현장실습을 했습니다. 전국에서 온 신학생들은 서울 또는 서울 근처 각 제단에 배치되어 낮에는 공부를 하고 저녁에는 배치된 제단에 가서 숙식을 했습니다.
전 주민이 심방 상대
저는 정국모관장님이 시무하던 의정부 중앙에 배치되었습니다. 그런데 신학원에 다니다가 1975년 4월 30일 의정부 중앙 관할 지역 중 교역자가 없는 갈현전도관으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곳은 우리나라 서부 전선 제일 북쪽에 위치한 전도관으로 경기도 파주군 탄현면 갈현 2리 416-1번지 언덕 위에 있었습니다.
갈현리 교인들은 새벽에 일어나면 논밭에 일을 하러 가기 때문에 맑은 날에는 만나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비가 오는 날은 ‘전 주민 심방하는 날’이었습니다. 교인들을 모두 교회에 모이라고 하여 갈현리에 사는 모든 주택을 언덕 아래에 있는 집부터 한집씩 찾아가 전도를 했습니다. 비가 오는데 우산을 쓰고 들어가 예배를 드리러 왔다고 말씀을 드리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기독교를 믿는 집이든 불교를 믿는 집이든 무종교이든 가리지 않았고 집집마다 예배를 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