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민 전직 관장 편 ⑥ 법정에서 유호준 목사를 꾸짖으심

6. 법정에서 유호준 목사를 꾸짖으심
발행일 발행호수 2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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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덕소신앙촌 주택가 모습

부산 전도관으로 발령
부산 전도관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영주동 산 등정에 2층 200평 제단으로 신축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새벽예배를 마치면 곧바로 국제시장에 내려와 신앙촌 카스텔라 판매에 전력을 다하곤 했습니다. 매일 신앙촌 제과공장에서 기차 편으로 발송한 카스텔라 50상자가 도착하면 큰 리어카에 실어 국제시장 판매소에 쌓아두고 시내 가게에 배달하는 일이란 힘들었지만 제겐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 5시가 되면 영주동 제단에 올라가 한 시간 동안 옥중에 계신 하나님을 사모하며 찬송과 기도를 계속하며 은혜를 받았습니다.

법정에서의 종교재판
죄 없는 하나님을 투옥해 놓고 신앙촌 역사를 뿌리 뽑기 위해 날뛰었던 자유당 정권의 배후에는 기성교회 목사들이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모두 박마리아의 지시에 따라 배후에서 조종하는 목사들이 시키는 대로 집행했습니다. 당시 이용훈 검사가 법정에서 심문 할 때도 성경구절을 읽으며 종교재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기성교계를 대표한 총무 (유호준 목사)와 하나님과의 대질 심문을 하였습니다.

목사들이 안찰을
하지 못하는 것은
성신 받지 못한 증거
유 목사가 나와 하나님께 질문하기를 “성서에 의하면 사람의 죄는 오직 예수의 피로 씻거늘 박 장로는 교인들에게 안수 안찰을 하면서 그 사람의 죄를 사해준다고 하는데 어찌 그런 행동을 할 수 있는가? 그러기에 당신은 이단입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님께서 “목사님 성경 요한복음 8장 15절을 읽어보세요.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손으로 무리에게 안찰하니 즉시 성신을 받으니라 하였고, 너희가 성신을 받으면 뉘 죄던지 사하면 사해지고 정하면 정해지리라 하지 않았습니까? 목사들이 안찰을 못하는 것은 성신을 받지 못한 증거요, 내가 안찰할 때 성신을 부어서 죄를 지적하고 그 죄를 소멸하여 주는 것입니다.” 그러자 말문이 막힌 유호준 목사는 얼굴이 홍당무가 되어 급히 퇴장하는 걸 보았습니다.

이때 우리측 변호사가 이는 종교재판이라며 항의 했으나 아랑곳 하지 않고 그들은 각본대로 판결하고 말았습니다.
그 후 이승만 정권은 무너졌고 장면 정권이 또 다시 하나님을 구속하여 내일이면 중형을 선고한다는 그날 밤 여호와 뒤집어엎으시는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듣기론 5·16 군사혁명이 일어난 아침 우리 측 변호사가 하나님께 군사혁명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씀 드리자 웃으시며 “나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라고 말씀 하셨다고 합니다.

돌아오신 하나님
군사혁명으로 인해 우리의 선한 목자가 석방되어 신앙촌으로 돌아오시는 날 양떼들은 자택으로 들어오실 것을 예상하고 길가에 나와 줄지어 서서 환영하려 했으나,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오만제단으로 직행하신 후 머리를 다듬으시고 단에 서신 그 모습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두 번째 울타리 덕소신앙촌
며칠 후 간부들과 회의실에 모였을 때 변질된 간부들이 자기들이 주도권을 잡겠다고 하는 모습들을 보시고 오염된 그곳에선 뜻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비쳐보시고 묵묵히 나오신 후 변질되지 않은 양들을 구분해 옮기기 위해 제2 신앙촌 건설을 계획하시고 부지를 물색하시다가 경기도 덕소읍 한강변을 선정하시고 제2신앙촌 건설을 시작하시게 되었습니다.

한강변에 덕소신앙촌건설
인재교육을 위한 학교와
철제생산 제강공장 건립
덕소신앙촌 건설 역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인천 전도관 관장으로 있었습니다. 그때 한강변에 외국인 별장 같은 주택과 아담한 제단을 지으신 후 인재 교육을 위해 초·중·고등학교를 지으시고 간장공장을 지을 때는 밤을 꼬박 새우는 작업을 직접 지휘하셨고, 제강공장을 지을 때도 현장에서 불철주야 독려 하셨습니다. 완공 후 철제생산을 위해 해외로부터 고철을 수입해 들어올 때 인천 앞바다 부두에서 고철 하역작업을 하고 철도를 이용해 덕소역까지 운반했습니다. 그때 저도 배를 타고 밤 작업 현장 경비를 했었습니다. 그리고 여름이 되어 홍수로 공장이 물에 잠겼을 때는 피해를 줄이기 위해 애타하시며 고생하시던 하나님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렇게 힘들게 기업을 이끌고 가시면서도 주일이면 덕소에서 새벽예배를 인도하시고 오전에는 서울 시내 여러 중앙을 둘러 소사신앙촌, 인천전도관까지 집회를 마치시고 늦게 덕소로 가셨던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권능의 역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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