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일개 부흥강사가 아니라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

이교선(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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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6년 경기도 안성군 보개면에서 1남 3녀 중 맏딸로 태어났습니다. 대로변에서 큰 약방과 잡화점을 운영했던 저희 집은 해마다 농토를 늘려 가면서 부유하게 살았습니다. 자수성가하신 아버지는 근면하게 일하시며 모든 면에 존절하고 깨끗하게 생활하셨고, 저는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면서 세상을 바르고 가치 있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1950년 6·25 전쟁이 일어나자 서울 지역의 학생들이 안성으로 피난을 내려와서 공부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니던 안성여중에서 배화여중 학생들이 같이 수업을 받았는데, 감리교인인 그 학생들은 성경과 하나님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했습니다. 저는 교회에 다녀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 이야기가 무척이나 새롭고 신기하게 느껴졌습니다. 특히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된다는 말이 인상 깊게 남아서, ‘사람의 평가가 전부가 아니고 마지막에 신의 심판을 받게 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었습니다. 당시 저는 한창 사춘기 때에 육이오전쟁을 겪으면서 친구들끼리 말세(末世)라는 말을 자주 했었기에, 심판에 관한 이야기가 더욱 절실하게 와 닿았습니다.

얼굴이 해님같이 환하게 핀 친구는
서울 이만제단에서 박장로님의
예배에 참석하여 체험한 놀라운
이야기를 나에게 들려 주었다

그 후 안성여고를 졸업한 이듬해인 1957년 5월이었습니다. 하루는 가게를 보고 있는데 문밖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서 나가 봤더니, 한동안 보지 못했던 친구 금순이가 외출복 차림으로 서 있었습니다. 금순이는 어찌 된 일인지 얼굴이 해님같이 환하게 피어서 못 알아볼 정도로 예뻐진 것이었습니다. 원래 통통했던 아이가 살이 빠져 날씬해진 모습에 연신 생글생글 웃고 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좋은 일이 있거나 귀한 선물을 받은 것처럼 보였습니다. “금순아 웬일이니? 우리 가게에 들어가자.”라고 했더니 “아니야, 서울에 다녀오는 길이라 집에 빨리 가야 돼.” 하며 인사만 나누고 집으로 가려 했습니다. 저는 평소와 너무나 다른 금순이의 모습에 호기심이 생겨서, 가게가 비어 있다는 걱정을 잠시 접은 채 금순이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습니다.

금순이는 서울 언니네 집에 갔었다고 하면서, 언니를 따라 박태선 장로님의 집회에 참석했던 이야기를 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서울중앙전도관(이만제단)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금순이는 수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것을 보면서도 별다른 감흥 없이 구경꾼처럼 앉아 있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예배를 드리던 어느 순간, 자기도 모르게 마음속에서 기쁨과 즐거움이 샘솟아나는데 주체할 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었습니다. 금순이는 “교선아, 우리가 학교 다닐 때 말세라는 말을 자주 하지 않았니? 지금 서울에서는 박 장로님을 보고 말세의 주인공이 나타났다고 난리가 났어.”라고 했습니다. “그래? 그 장로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데?” 하고 물었더니 클 태(泰)자에 착할 선(善)자라고 일러 주는데, 이상하게도 존함을 듣는 순간 그분이 참으로 높고 귀하신 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안성에도 금년 내로 전도관이 서게 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기에, 그때를 기다리며 전도관에 꼭 나가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클 태자 착할 선자, 그 분의 존함을
듣는 순간 이상하게도 그 분이
‘참으로 높고 귀하신 분’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두 달이 지난 6월 27일, 안성읍에 생긴 전도관에 처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저는 제일 깨끗하고 좋은 옷을 입고 양산을 든 차림으로 금순이와 함께 집을 나섰습니다. 안성전도관은 제과 공장 건물의 2층에 마련된 예배실로, 어린이부터 어른까지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옳은 길 따르라 생명의 길~” 하는 찬송가를 어찌나 잘 부르던지, 손뼉을 치며 귀엽게 찬송하는 모습을 마냥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매일 새벽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면서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서울 이만제단에서 집회가 열렸을 때 저도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되는 집회 기간 동안 밤새워 찬송을 부르면서,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생각도 없을 만큼 배고픈 줄을 몰랐으며, 잠시라도 그 자리를 떠나고 싶지가 않았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수만 군중들이 우렁차게 찬송을 부를 때면 웅장한 제단이 다 흔들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저는 진심을 다해 찬송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마치 메말라 있던 산천초목들이 단비를 흠뻑 맞아 기쁨에 차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습니다.

은혜를 받고 나니
아무리 화려한들 눈길이 가지 않았고
좋은 것을 봐도 갖고 싶은 마음 없어
마음속엔 기쁨과 즐거움만이 샘솟아

매일 새벽마다 박 장로님께서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안수하시고 “병 나은 사람 일어나라!” 하시면, 놀랍게도 벙어리가 말문이 트여 더듬더듬 말을 하고 앉은뱅이가 일어서는 등 놀라운 기적이 수없이 일어났습니다. 여기저기서 무슨 병이 나았다, 무슨 은혜를 받았다 하며 이야기하는데, 저는 며칠이 지나도록 받아지는 것이 없어서 몹시 안타까울 뿐이었습니다. 단상에서 찬송을 인도하시는 박 장로님을 바라보다가, 순간적으로 ‘저분을 뵈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차라리 오지 말걸 그랬다.’ 하는 실망스런 생각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박 장로님께서 찬송을 멈추시고 “나는 일개 부흥강사가 아니다. 동방의 일인, 감람나무다!” 하고 외치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얼마나 놀랐는지 그 놀라움을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곧바로 통성기도를 하라 하시니 군중들의 기도 소리로 제단은 금세 떠들썩해졌습니다. 저도 자리에 엎드려서 “잘못 생각했습니다. 잘못 생각했습니다.” 하고 기도드리는데, 갑자기 뜨거운 불이 심장 쪽으로 들어오더니 배 속에 있는 모든 것이 입으로 빠져나가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느낌이 너무나 분명하고 생생해서 얼른 입에 손을 대 보았지만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었고, 그때부터 속이 텅 빈 것처럼 느껴지며 온몸이 날아갈 듯이 가볍고 시원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나는 동방의 일인이요 감람나무다!”라고 외치셨던 그 순간의 놀라움과 경외감이 제 마음에 선명하게 새겨졌습니다.

그렇게 은혜를 받은 후부터는 아무리 화려한 곳에 가도 눈에 들어오는 것이 없었고, 아무리 좋은 것을 봐도 가지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바람을 부는 기계로 풍풍 바람을 넣어 주듯이, 제 마음속에 기쁨과 즐거움이 풍풍하며 샘솟아 나는데 그 기쁨을 세상의 무엇과도 바꾸고 싶지 않았습니다. 문헌에서도 보지 못했고 상상할 수도 없었던 기쁨과 즐거움이 나날이 새롭게 채워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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