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핍박을 해도 받은 은혜는 부인할 수 없어요

이교선(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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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만제단 집회에서 저는 박 장로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을 받아 오게 되었습니다. 약방을 운영하는 저희 집에는 크고 작은 예쁜 유리병들이 많아서 그 병에 생명물을 옮겨 담고 싶었는데, 그러기 전에 병을 깨끗하게 우려내려고 먼저 우물물을 담아 두었습니다. 쓰지 않는 빈방에 생명물을 받아 온 유리병과 우물물을 담은 유리병을 나란히 놓아두고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즐거워했습니다. 그러던 1957년 12월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났더니 밤사이에 갑자기 눈이 쏟아지고 기온이 뚝 떨어져서 전날과는 비교할 수 없이 추운 것이었습니다. 저는 생명물이 어떻게 되지는 않았나 걱정되어 그 방에 뛰어갔다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물물을 담은 유리병들은 모두 깨져서 유리가 조각조각 잘게 부서져 있고 병 모양의 얼음 덩어리만 꽁꽁 얼어붙어 있는데, 생명물을 담은 유리병은 전혀 얼지 않은 상태로 오히려 따뜻한 물을 담은 것처럼 잔잔한 물방울이 맺혀 있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수십 일이 지나 1958년 1월 중순에 생명물이 꽁꽁 얼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가족들에게 물어봐도 생명물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고 하니 어찌된 영문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주 일요일에 제단에 가서 신앙신보를 받아 들자 첫눈에 보이는 것이 ‘이제부터 생명물에 은혜를 끊으니 일절 사용하지 말라.’ 하신 말씀이었습니다.(1958년 1월 20일자 신앙신보) 설교하신 날짜가 1월 12일이니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즉시로 그 말씀이 전국에 있는 생명물에 그대로 응한 것이었습니다. 순간 ‘아!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시면 무용지물이 되는구나.’ 하고 무릎을 치면서 그 말씀과 권능에 놀라고 또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해 여름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처음으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안찰을 받는 가운데, 저는 긴장되는 마음으로 앞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눈과 배에 살짝 손을 대실 뿐이었지만 어떤 사람은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까지 쳐서 팔과 다리를 붙잡아 주어야 했습니다. 특히 제 앞의 여자 분이 안찰을 받을 때는 “왜 이런 더러운 죄를 지었나요?” 하시며 죄를 지적하시는 것을 보면서, 모든 죄가 백일하에 드러난다고 생각하니 참으로 떨리고 두려웠습니다. 그런데 안찰을 받고 나자 기쁨과 즐거움이 연속으로 샘솟아 나는데,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와서 손으로 입을 가리고 자제해야 했습니다. 또 영화 포스터처럼 난잡한 그림에는 눈길도 주기가 싫어져서 복잡한 번화가를 지날 때면 시선을 돌리지 않고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희는 말에나 행실에나 장차 자유율법대로 심판받을 자로 알고 행하라.” 하는 성경 구절(야고보 2장 12절)을 풀어 주시며 “자유율법을 지킨다는 것은 눈으로도 마음으로도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는 것”이라고 깨우쳐 주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대로 일생을 맑고 깨끗하게 살아가고 싶었습니다.

저희 부모님은 유교적인 가풍이 몸에 배이신 분들로, 처음부터 제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셨습니다. 시간이 흘러 제가 전도관에 열심히 다닐수록 반대도 점점 심해졌습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존경하며 그 뜻을 거역해 본 적이 없었지만, 전도관에 가지 말라는 말씀만은 따를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불같이 화를 내실 때마다 속으로 수없이 되뇌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받은 은혜를 아무리 부인하려 해도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 가르침대로 사는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길임을 알았는데, 어떻게 이 길을 떠날 수 있겠습니까?’ 부모님과 동생들까지 전도관에 가지 못하게 막았지만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 길을 따라야겠다는 생각이 더욱 굳건해졌으며, 마음속에는 불안이나 괴로움 없이 항상 잔잔한 평안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당시 저희 외할머니는 청주의 조카 집에서 살고 계셨는데, 저는 외할머니를 전도하여 함께 전도관에 다녔으면 하는 생각을 자주 했습니다. 그래서 청주까지 찾아갔으나 그 집이 강원도 원주로 이사하는 바람에 할머니를 만나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 후 1959년 3월에 외할머니가 경기도 가평의 아들 집에 다니러 가셨다가 거기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장례식에 다녀오신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 “너희 외할머니도 전도관을 다니다 돌아가셨다.”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자초지종을 여쭈었더니, 외할머니는 원주에서 전도를 받아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셨으며, 돌아가시던 날도 계속 기도를 하시다가 그대로 숨을 거두셨다고 했습니다. 가평에 있는 가족들이 아무도 전도관에 다니지 않았기 때문에 전도관에 알리지 않고 장례를 치렀는데, 장의사가 하는 말이 84세의 할머니가 이렇게 깨끗하고 예쁜 시신은 처음이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동그랗게 굽어 있던 허리가 숨을 거두신 후에 곧게 펴져서 “원래 허리가 굽으면 입관할 때 허리를 꺽어야 하는데 어떻게 시신이 저절로 허리가 펴질 수가 있나?” 하며 놀라워했다고 했습니다. 저는 전도관에 다니면서 뻣뻣하게 굳고 험악해진 시신이 생명물로 씻으면 아름답게 핀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는데, 외할머니는 생명물로 씻지 못하셨어도 하나님께서 함께해 주신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그 후 저는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여 아기 시신이 예쁘게 핀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아기는 우 장로님의 한 살배기 아들로, 숨을 거둔 후에 생명물로 씻어 유리관에 눕혀 놓았는데, 마치 따끈따끈한 아랫목에 누워서 곤하게 잠이 든 것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맑고 뽀얀 피부에 발그스름하게 물든 볼, 천사처럼 천진한 미소를 보니 ‘저렇게 예쁜 아이를 어떻게 땅에다 묻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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