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생활을 돌아보며 죄짓지 않으려고 늘 조심

김장예 집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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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소사신앙촌 건설 당시 모습

집회가 끝날 무렵 원효로에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전도관’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집회를 마치고 다음 날 원효로에 찾아갔더니 기차처럼 기다랗게 생긴 예배실에 사람들이 모여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매일 전도관에서 철야하고 다음 날 새벽예배를 드렸는데, 날이 갈수록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전날 가지 않으면 새벽예배 때 자리가 없을 정도였습니다.

제단에서 기도드리고 있으면 어쩐 일인지 머리카락 타는 것 같은 누린내가 지독하게 났습니다. 처음에는 주변에서 무언가를 태우는 줄 알았지만 아무리 둘러봐도 그런 것은 없었고 누린내는 며칠 동안 계속 진동했습니다. 하루는 누린내 같은 역한 냄새가 코를 들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나더니 순간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아주 좋은 향기가 맡아졌습니다. 그 향기는 싱싱한 백합꽃 향기 같기도 하고 맛있는 냄새 같기도 했습니다. 옆에 앉아 있는 어른 분들에게 “방금 전까지 역한 냄새가 나더니 이젠 또 향기가 나요.”라고 했더니 “아가씨가 은혜 받았네.” “그게 죄를 태우시는 거예요.” 하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신을 주셔서 내 속의 죄를 태우시면 누린내처럼 타는 냄새를 맡기도 하고, 또 성신의 향기를 주시면 아주 좋은 냄새를 맡게 된다고 했습니다. 저는 ‘내 속의 죄를 태워 주셨구나!’ 하며 참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죄를 씻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셨던 설교 말씀을 들은 후부터 저는 어떻게 내 죄를 씻을까 하는 생각을 자주 했는데, 성신으로 죄를 태워 주시고 향기까지 주셨다니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박 장로님께 안찰을 받은 후로
평소 고집 부리고 자주 신경질 내던
성격이 변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고
죄를 짓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게 돼

원효로전도관에서 박 장로님께서는 안찰을 자주 해 주셨습니다. 안찰을 통해 성신을 부어 주시기 때문에 안찰을 받은 사람들은 병이 낫기도 하고 신기한 체험을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안찰 받는 꿈을 꾸게 되었는데 박 장로님께서 배를 안찰하시며 두 손을 살짝 얹으시자 꿈인데도 얼마나 아픈지 팔다리를 버둥거리며 고함을 쳤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제로 안찰을 받을 때도 꿈에서와 똑같이 박 장로님께서 손을 대시자마자 너무 아파서 버둥거리며 고함을 치고 말았습니다. 참기 어려울 정도로 심하던 통증이 점점 물러가고 시원함을 느낄 때 박 장로님께서는 손을 떼셨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의 손이 닿기만 하는데도 왜 이렇게 아플까 궁금했는데 내 속의 죄가 성신에 대항하기 때문에 통증을 느끼게 된다는 말씀을 나중에 들었습니다. 안찰 받을 때 버둥거리고 소리까지 쳤던 저는 ‘내가 죄지은 정도대로 아프구나!’ 하며 몹시 부끄러웠습니다.

저는 평소 어머니에게 고집을 부리고 신경질을 내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안찰을 받은 후로는 속상한 일 하나 없이 마음이 편안하기만 했습니다. 그리고 생활 중에 ‘이렇게 마음먹은 것이 죄가 될까? 이런 생각은 죄가 아닐까?’ 하고 저 스스로를 돌아보며 죄를 짓지 않으려고 조심조심하게 됐습니다.
날이 갈수록 원효로전도관에 찾아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마포 산언덕에 웅장한 이만제단을 짓게 됐습니다. 그리고 인천, 안양, 수원 등 곳곳에 전도관이 세워졌는데 저는 새로 지은 전도관에서 개관집회가 열릴 때도 자주 참석했습니다.

소사신앙촌 건설 때 하나님께서는 매일 현장에 나오셔서 건설대원과 작업하셔
한번은 안수 받을 때 하나님 손이 내 머리에 닿는 순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불덩어리가 확 내려오는 것처럼 뜨거워지고 입 안에 단물이 계속 감돌아 신기해

한번은 지방의 개관집회에 다녀오겠다고 부모님께 말씀드리니, 어머니는 잘 갔다 오라시며 여비를 챙겨 주셨지만 아버지는 전도관에 꼭 다녀야겠느냐며 못마땅해 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 말씀이 “전도관에 다녀서 나쁠 게 없어요. 우리 애가 달라진 거 보세요. 아프던 머리도 박 장로님 집회에 가서 나았지, 전도관에 다니면서 온순하고 착해졌는데 반대할 이유가 없잖아요.”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그 말씀을 들으며 어머니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흔쾌히 승낙하셨던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어머니는 이만제단에 다니며 전도관 교인이 되셨습니다.

그 후 1957년 가을 무렵에는 경기도 부천에 신앙촌이 건설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때 은혜의 마을 신앙촌을 건설하는 일에 동참하려고 건설대에 자원하는 젊은 교인들이 많았습니다. 저도 건설대에 자원해 1957년 11월 7일 신앙촌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건설대원들은 각자 직업도 다르고 말씨도 달랐지만 한마음으로 뭉쳐서 힘을 모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매일같이 현장에 나오셔서 건설대원들과 함께 작업하시고 안수와 안찰로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한번은 안수를 받을 때 하나님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불덩어리가 확 내려오는 것처럼 뜨거웠습니다. 그리고 사탕을 먹은 것처럼 입안에 단물이 계속 감돌며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픈 줄을 몰랐습니다. 저는 체구도 작고 힘든 일을 해 본 적이 없었지만 물지게를 지고 훌훌 나는 것처럼 다녔던 것이 지금 생각해도 신기하기만 합니다.

소사신앙촌에 주택 지대와 공장 지대가 지어지면서 만 명이 넘는 교인들이 입주를 했습니다. 건설이 마무리된 후 건설대원들은 각 공장에서 근무했는데, 저는 캐러멜과 카스텔라 생산으로 바쁘게 돌아가던 제과 공장에 배치되었습니다.

작업 중 칼날에 손가락 베이는 사고 나
마침 공장 순회를 오신 하나님께서
다친 손가락을 붙잡고 축복해 주시자
그토록 아프던 통증이 눈 녹듯이 사라져

하루는 캐러멜 자르는 기계를 보고 있을 때였습니다. 캐러멜이 네모반듯하게 잘리지가 않아서 그것을 고치려고 기계에 손을 넣었다가 잘못하여 칼날에 손가락 두 개를 깊이 베이고 말았습니다. 입고 있던 앞치마로 피가 흐르는 상처를 급히 감싼 후 병원에 가려고 나서는데 마침 공장 순회를 오신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손을 내밀어 보라 하시더니 다친 손가락을 붙잡으셨습니다. 순간 그토록 저리고 아프던 통증이 눈 녹듯이 스르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솜과 붕대를 가져오라 하셔서 축복하신 후 다친 손을 감싸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도 아프지 않았지만 공장장님이 그래도 쉬어야 한다고 하셔서 저는 며칠 쉬었다가 다시 공장에 나갔습니다.

그 후 하나님께서 공장에 오셨을 때 안수를 해 주신다고 하여 직원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 적이 있었습니다. 저도 안수를 받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제 앞에 오셔서 “손부터 내놓으라우.” 하시며 먼저 다친 손을 축복해 주시고 안수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프지 않아?” 하고 물으시는데 저는 손을 다친 사실을 완전히 잊을 만큼 아프지 않았기 때문에 저도 모르게 아주 큰 목소리로 “하나도 안 아픕니다!”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그 모습을 보신 하나님께서 환하게 웃으시고 사람들도 왁자하게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김장예 집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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