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받은 가장 큰 복은 하나님을 만나고 이 길을 따라온 것

조경임 권사(3) / 서울 노량진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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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희 식구들은 오빠가 서울 미군부대에서 근무하고 저도 직장 생활을 계속하면서 작은 집을 마련하게 되었고, 고향에 계시던 어머니와 동생들도 서울에 올라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 후 스물네 살에 결혼한 저는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몇 년 동안 제단에 다니지 못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기간 동안 전도관과 신앙촌이 그리워서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아주머니만 봐도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고, 또 제단에 가지 못하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습니다.

그렇게 몇 년이 흘러 이제는 꼭 전도관에 나가야겠다고 마음먹고 있던 어느 날, 신앙촌 물건을 판매하러 다니는 아주머니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우리 집에 들어오시라고 해서 이것저것 물건을 사고는 “전도관에 다시 나가고 싶은데 어디로 가야 돼요?” 하고 물었더니, 아주머니는 전도관에 다녔던 식구였냐고 반색을 하며 일요일에 데리러 오겠다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려고
모이는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멀리 떠나 있다 돌아온 저에게도
귀한 은혜를 주시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드려

그 주 일요일에 신앙촌 아주머니와 함께 간 곳이 서울 노량진에 있는 8중앙 전도관이었습니다. 예전에는 노량진제단이 작은 건물을 빌려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때는 한강 변에 3층짜리 큰 제단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날 하나님께서 8중앙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기장신앙촌에 계신 하나님께서는 주일마다 부산에서 올라오셔서 소사와 덕소신앙촌, 서울의 큰 제단까지 열 곳이 넘는 제단을 다니시며 예배를 인도해 주신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단에 가득 찬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인도로 힘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은혜를 받으려고 모이는데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나.’ 하는 생각에 눈물이 계속 흘렀습니다. 멀리 떠나 있다 돌아온 저에게도 귀한 은혜를 주시기를 마음을 다해 기도드렸습니다.

그 후 저는 기장신앙촌 축복일에 가서 눈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줄을 서서 한 명씩 안찰을 받았는데 제 차례가 되어 하나님께서 두 눈에 손을 대시는 순간 얼마나 아픈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눈에 살짝 손을 대시기만 하는데도 너무 아파서 저도 모르게 발버둥을 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런데 잠시 후 통증이 차츰차츰 사라지더니 눈이 말할 수 없이 시원해질 때 하나님께서 손을 떼셨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안찰을 통해 성신을 부어 주시며 내 속의 죄가 그 성신을 대항할 때 통증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내 죄가 얼마나 많으면 안찰을 받을 때 그토록 아팠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고, 또 죄를 씻어 주시고 나니 눈이 그렇게 시원해졌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안찰을 받고 나서 눈을 보니 뜻밖에도 눈에 있던 빨간 반점이 없어졌습니다. 얼마 전부터 눈동자에 빨간 반점이 생겨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불편했는데, 안찰을 받고 나니 반점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눈동자가 유리알처럼 깨끗해 보였습니다.

생명물로 시신을 씻긴 후 고인의 모습을 보니 피부가 뽀얗게 피어나고 입술이
발그스름해 그 모습을 본 고인의 아들은 어머니 얼굴이 살아 계실 때보다도
더 좋다며 놀라워했고 천부교 장례식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며 정중하게 인사

그 후 저는 1992년부터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며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는 상점을 열게 되었습니다. 다른 권사님 한 분과 함께 상점을 마련해 한 명은 가게를 지키고 한 명은 판매하러 다녔습니다. 신앙촌 제품을 좋아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다 보니 판매를 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고 고객들과 가족같이 친하게 지냈습니다. 10년 넘게 소비조합을 하는 동안 자식들은 그만 은퇴해서 편안히 쉬라고 했지만, 저는 나이 들어서도 활동하는 것이 건강에도 좋고 내 평생에 가장 즐겁고 보람된 일을 한다고 이야기하곤 했습니다.

지금부터 10여 년 전으로 기억되는데 연로하신 할머니 권사님이 노량진제단에 와서 예배를 드리신 적이 있었습니다. 예전에 전도관에 다녔던 그분은 집이 노량진으로 이사하게 되면서 가까운 제단을 찾아오신 것 같았습니다. 점잖은 그분은 거동이 많이 불편하셨지만 마지막 소원이라며 신앙촌에 가기를 간절히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축복일에 제가 모시고 신앙촌에 가기로 했더니 그때부터 권사님은 신앙촌에 가는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셨습니다. 신앙촌에서 예배드리며 어린아이같이 기뻐하시는 권사님을 보니 그동안 권사님이 신앙촌을 얼마나 그리워하셨는지 알 것 같았습니다. 저는 서울에 돌아온 후에도 가끔 권사님 댁에 가서 말벗을 해 드렸는데 권사님은 얼마 후 숨을 거두시게 되었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리는 날 장례반 권사님들이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고 교인들은 관장님의 인도로 힘차게 찬송을 불렀습니다. 다 씻긴 후에 고인의 모습을 보니 피부가 맑고 뽀얗게 피어나고 입술이 발그스름한 빛을 띠어서 그렇게 고울 수가 없었습니다. 고인의 아드님은 우리 어머니가 이렇게 예쁜 분이었냐며 감탄을 했습니다. 어머니 얼굴을 보고 또 보면서 살아 계실 때보다 얼굴이 더 좋을 수 있냐며 놀라워했고, 이렇게 예쁜 어머니를 어떻게 땅에 묻겠냐고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 회사의 중역을 맡고 있다는 그 아드님은 천부교의 장례식을 보고 큰 감동을 받았다며 정중하게 인사를 했습니다. 그 후에 전해 들은 일이지만, 고인의 며느리도 고등학교 동창회에 가서 천부교의 장례식 때 고인의 아름답고 편안한 모습을 보고 감동을 받았다는 말을 했다고 합니다.

내 죄가 얼마나 많으면 안찰을 받을 때
그토록 아팠을까 하는 생각에 부끄러워
눈 안찰 받은 후 눈에 있던 빨간 반점이
사라지고 유리알처럼 눈동자가 깨끗해져

신앙촌 소비조합으로 활동했던 저는 은퇴 후에 제단 일을 돌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여든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었지만 힘닿는 대로 활동하며 일하고 싶은 것이 저의 소원입니다. 매일 새벽예배를 드리기 위해 제단으로 걸어갈 때면 이만제단에서 울려 퍼지던 음악종 소리가 귓가에 울리는 것 같습니다. 한시라도 빨리 예배에 참석하고 싶어서 힘차게 내달렸던 그때를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짓게 됩니다. 하나님을 뵙고 이 길을 따라온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매일매일 생각해 봅니다. 한없이 주시는 은혜로 귀한 이 길을 걸으면서도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은혜를 간직하지 못했던 지난 시간이 부끄럽고 죄송할 뿐입니다. 지금도 그 은혜를 변함없이 내려 주시니 자유율법을 지키며 맑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으로 힘차게 하루를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함께해 주시기를 두 손 모아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조경임 권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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