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전도관의 추억/이종순 권사
대포껍데기 매달아 종을 치며 신나게 주일학교 반사 활동`평창”
얼마 전 동계올림픽 개최지로 발표되면서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도시가 평창입니다. 그렇지만 저에게는 하나님께서 시골 골짜기의 평창전도관을 찾아서 두 번이나 오신 곳이라서 더 의미가 깊은 곳입니다.
1960년대 초, 평창에서 서울로 가는 데는 꼬박 12시간이 걸렸습니다. 2월 어느날 이만제단에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새벽 5시 콩나물 시루같이 빽빽히 사람을 태우고 출발한 차는 그날 오후 5시쯤 되어서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같이 전도관에 다니던 친구 두 명과 함께 나섰는데, 강원도 평창 시골과 달리 서울은 덜 춥다는 소리를 듣고 저고리 치마만 입고 갔다가 추워서 얼어 죽을 뻔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렇게 도로도 좋지 않고 12시간이나 걸리는 길을 하나님께서 두 번이나 찾아오셨습니다. 한번은 겨울이었습니다. 전재 문재로 오실 때였는데, 오셔서는 “눈을 치우며 왔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금덩어리는 똥통에 떨어졌다 꺼내도 금덩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담기면 어디를 가든 쓰러지지 않는다”라는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또 한번은 여름이었는데 하나님 오시는 모습을 먼저 볼거라고 주일학생들이 후평까지 큰길에 도열해 서서 기다리다가 하나님께서 오시자 사내 아이들은 웃통을 벗어 들고 흔들던 기억도 납니다.
도로 사정이 좋지 않던 시절 열두시간이나 걸리는 거리를
두 번이나 찾아오신 평창전도관
그때 저는 주일학교 반사를 했습니다. 토요일만 되면 제단에 찾아가 전도사님에게 체계 말씀 공부를 했습니다. 그때 공부했던 것이 지금까지 신앙생활에 큰 바탕이 되어주고 있습니다. 일요일만 되면 동네를 꽝꽝 울렸던 기억이 납니다. 주일학생만 200명 정도 되었으니까요. 주일학생은 남녀분리해서 맡았고, 한 반에 거의 20여 명씩, 반사가 10명이었습니다. 주일이면 아이들이 제단에 차고 넘쳤습니다.
없이 사는 사람이 많던 시절이죠. 옥수수밥, 보리밥 먹던 시절인데 교회에 오면 뭐 특별한 것은 없고 찬송하고 율동하며 캐러멜 한두 개씩 줬던 것 같습니다.
이 사진은 1963년 여름에 하기학교를 하면서 전도관 입구에서 우리 반 아이들과 전도사님과 함께 찍은 사진입니다. 제가 서있는 왼쪽에 보면 기둥에 ‘평창전도관’이란 명패가 보이는데, 전도사님 뒤로 같은 자리에 하얀색 기둥과 시커먼 것이 기다랗게 매달려 있습니다. 그것은 대포 껍데기입니다. 교외 앞 마당에서 놀던 아이들을 그 대포 껍데기를 종 삼아 쳐서 교회 안으로 들어가게 하는 것입니다. 교회 건물과 별도로 교회 앞 마당에 교실 세 개짜리 교사를 지어 무료 교육을 하는 공민학교도 있었습니다.
/영월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