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신이 산 사람보다 더욱 곱게 피게하는 생명물의 권능

문영복(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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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이만제단에 계속 다니던 어느 날, 저는 입관예배를 드린 후 시신이 아름답게 핀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고인은 20대 여자 분이었는데 생명물로 씻은 뒤에 보니 뽀얗고 곱게 피어서 죽은 사람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할 만큼 예쁜 모습이었습니다. 또 그때가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시신을 모신 방 안은 시원한 기운이 감돌아 전혀 더운 것을 느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저는 놀라우신 하나님의 권능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생명물로 씻긴 후 시신을 보니 너무도 뽀얗게 피어나서
죽은 사람이라고는 생각이 안 되고 놀라우신 하나님의 권능을 깨달아

1957년 11월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는 건설대에 자원하게 되었고, 몇 달 후에는 제과 공장에서 근무하면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일하고자 했습니다. 한참 일을 하는 도중에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보면, 평소와 확연하게 차이가 날 만큼 얼굴이 밝고 환하게 보여서 ‘거울이 이상한가? 내가 잘못 본 건가?’ 하며 의아해하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울에 사는 언니가 근무 시간에 찾아와서 작업복 차림으로 만난 적이 있었습니다. 나중에 언니가 하는 말이 “사실은 그때 너를 집으로 데려오려고 했었어. 그런데 하얀 작업복을 입은 네가 천사처럼 예쁘고 고와 보여서 차마 집에 데려올 수가 없더라.” 하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국 팔도의 사람들이 모인 신앙촌에서 생활하는 동안 저는 새롭게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시골에서 올라온 순박한 교인들이 넉넉한 마음씨로 항상 남을 먼저 배려하는 것을 보면서, 서울깍쟁이 같은 저의 성품을 되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신앙촌 사람들은 고향도 다르고 말씨도 달랐지만 은혜를 받은 한 가족이었습니다.

신앙촌에 모여온 사람들은 고향도 다르고 말씨도 달랐지만
모두가 은혜를 받은 한 가족과 같아 서울 깍쟁이 내 성품을 돌아보게 돼

그 후 사범학교를 졸업한 저는 소사신앙촌에 설립된 시온초등학교에서 근무하게 되었는데, 장학사이시던 당숙은 신앙촌에서 일하는 것을 반대하시며 일반 학교의 교사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당숙과 대화를 나누는 중에 “거기 생수가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이라고 하던데…….”라고 하시기에 제가 전도관에서 경험한 일을 차근차근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생명물 축복하시는 것을 직접 봤던 일과 생명물로 씻긴 시신이 얼마나 아름답게 피는지 자세하게 이야기했습니다. “세상에는 한 나라를 이끄는 사람도 있고 빛나는 업적을 남기는 사람도 있지만, 저는 여러 가지 길 중에 진정으로 가치 있는 길을 알았습니다. 세상이 무어라 해도 이 길을 가고 싶습니다.” 그때 저는 대통령이나 위대한 발명가가 되는 것보다도 신앙촌에서 일하는 것이 더욱 가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사신앙촌 초등학교에서 몇 년 동안 근무한 저는 1964년에 덕소신앙촌으로 입주를 했습니다. 활기차게 돌아가는 생산 현장에서 열심히 일하고 싶은 마음에 제과 공장 근무를 자원하게 되었습니다. 제과 공장에서 포장을 담당했던 저는 잡념 없이 일에 열중하다 보면 어느새 몸이 날아갈 듯 가벼워지며 손이 더욱 빨라지는 것을 느끼곤 했습니다.

원래 편도선이 약했던 나는 편도선이 심하게 붓고 염증까지 생겨
병원에 수술 날짜를 잡아 놓았는데 수술 전날
하나님께 축복받은 솜에 생명물을 적셔 목에 감고 잔 후 아침에 일어나니
침 삼키기조차 힘들고 심했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져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께 축복을 받을 기회가 생겼습니다. 그때 탈지면을 가져가서 하나님께 드렸더니, 두 손으로 솜을 비비시며 한참 동안 축복해 주셨습니다. 원래 편도선이 약했던 저는 당시 편도선이 심하게 붓고 염증까지 생겨서 의무실 원금덕 선생님과 상의하여 병원에 수술 날짜를 잡아 두었습니다. 수술하기 전날 저는 축복받은 솜에 생명물을 적셔서 목에 감고는 잠자리에 들었는데, 아침에 일어나 침을 삼켜 보니 아무렇지 않게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전날 밤까지 침을 삼키는 것조차 무척 힘들고 아팠는데 그렇게 심하던 통증이 감쪽같이 사라져 버렸고, 원 선생님도 수술할 필요가 전혀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 너무나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때 제과 공장에서 생산하는 신앙촌 캐러멜과 카스텔라 등의 품목이 큰 인기를 끌어서 공장에서는 시간을 다투며 분주하게 생산했습니다. 당시는 커다란 물레에 감겨 있는 비닐 포장지를 긴 칼로 잘라서 사용했는데, 어느 날 포장지가 급하게 필요할 때 포장지를 자르는 작업자가 자리를 비운 적이 있었습니다. 평소에 그 작업을 지켜봤던 저는 급한 마음에 직접 포장지를 잘라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보통의 경우 칼을 쓸 때는 칼날을 아래로 향하게 하지만, 포장지를 자를 때는 칼날을 위로 하는 것을 봤었기에 저도 그렇게 칼을 쥐고 포장지를 자르기 시작했습니다. 곁에서 볼 때는 쉬워 보였는데 막상 하려니 잘되지 않아서 칼을 쥔 손에 있는 대로 힘이 들어갔습니다. 포장지가 완전히 잘라지는 찰나, 제가 저의 힘을 주체하지 못해 칼이 그대로 얼굴을 향해 튀어 올랐습니다. 그런데 칼날이 얼굴에 닿는 순간 칼을 쥐고 있는 손을 누가 확 하고 낚아채는 것처럼 튕겨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까무러칠 지경이었습니다. 얼굴을 감싸 쥔 채 그 자리에 엎어졌던 저는 겨우 정신을 차리게 되어, 피가 많이 흘렀을 거라는 생각에 얼굴을 감쌌던 손을 쳐다봤습니다. 그러나 피는 한 방울도 묻어 있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거울을 보니 얼굴에 빨간 줄이 생겼을 뿐 전혀 다친 곳이 없었습니다. 순간 감사함과 안도감으로 그 자리에 엎드려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그대로 칼에 찔렸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지금 생각해도 아찔할 뿐입니다. 저는 경솔하게 행동했던 저 자신을 반성하면서, 그처럼 위험한 순간에 보호해 주신 하나님께 한없이 감사를 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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