뼛속에서 우러나는 듯한 눈물이 쉴새없이 흘러내려

문영복(1)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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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38년 서울 종로구 충현동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습니다. 제가 어렸을 적 아버님이 독립 운동을 하다 돌아가시고 육이오전쟁 중에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시면서 저희 형제들은 외가의 보살핌을 받으며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부터 교회에 다니며 가끔씩 아무도 없는 조용한 교회에서 기도를 하곤 했습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하나님을 믿으며 살고 싶다.’ 하는 생각이 항상 마음속에 있었습니다. 중학교를 졸업한 저는 교사가 되기를 원하셨던 어머님의 말씀을 생각하며 서울사범학교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학교에 다녔을 당시는 육이오전쟁이 끝난 직후라 교육 환경이 무척 열악한 시절이었습니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저는 장차 외국으로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막연하게나마 가졌는데, 사범학교 2학년 여름방학 때 여행 삼아 부산을 구경하며 외국에 가는 배편도 알아보려고 부산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부산에 도착한 첫날 서대신동을 지날 때 어느 교회 건물이 유난히 제 눈에 띄었습니다. 그 교회 앞길에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고, 건물 벽면에는 ‘부산전도관’이라는 글자가 크게 쓰여 있었습니다. 가까이 다가가서 창문으로 안을 들여다보니 넓고 깨끗한 예배실에 사람들이 빼곡히 모여서 예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는 것 같았습니다. 평소에 장로교회와 천주교회 등 여러 교회를 다녀 봤던 저는 ‘지금 예배를 드리려나 보다.’ 하며 그 예배에 참석하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예배실 안으로 들어가 어른들 사이에 앉았는데, 제 옆의 아주머니 한 분이 “학생, 여기에 처음 왔나 보지?” 하시기에 그렇다고 대답했습니다. 곧 예배가 시작되어 사람들은 힘차게 손뼉을 치면서 찬송을 불렀으며, 예배를 마친 후에도 서로 이야기를 하느라 자리를 떠날 줄 몰랐습니다. “예배 시간에 아주 좋은 향기를 맡았다.” “불이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하는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신기해서 저는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방금 전에 저에게 말씀을 하셨던 아주머니가 “학생, 이번에 박태선 장로님이 가덕도에서 집회하시는데 같이 가지 않겠나.” 하고 권유하시는데, 그 집회에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어 가덕도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956년 8월이었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날, 많은 사람들이 박태선 장로님과 함께 2층짜리 큰 배를 타고 가덕도로 향했습니다. 가덕도 선착장에서 마주 보이는 대항 장로교회에서 집회가 열렸는데, 비가 쏟아지는 속에서도 사람들이 교회 바깥에까지 늘어서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영 죽을 나를 살리려~” 하는 찬송을 부르던 순간, 저는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눈물이 북받쳐 올랐습니다. 뼛속에서 우러난다고 해야 할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려서, 들고 있던 찬송가가 눈물로 범벅이 되어 가사가 보이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동네 교회에 다닐 때부터 불렀던 찬송이었지만 그토록 눈물을 흘리며 불러 보기는 처음이었습니다. 이제 그만 울음을 그치려 애를 써 봐도 솟아오르는 눈물을 억제할 길이 없었고, 그렇게 우는 동안 온몸이 훈훈해지며 마음이 참으로 따뜻하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예배를 드리던 중에 박 장로님께서 “병이 나은 사람은 다 일어나라!” 하고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예배실 이곳저곳에서 “벙어리가 말을 합니다!” “절름발이가 나았습니다!” 하며 많은 사람들이 일어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그저 놀랍고 신기할 따름이었습니다. 사흘 동안 계속된 그 집회에서 저는 마음이 한없이 포근하고 평온해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고, ‘이렇게 마음을 따뜻하게 해 주시는 저분을 따라야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후 서울에 돌아온 저는 박태선 장로님께서 서울 청암동에 전도관을 세우신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을 찾아가 보았습니다. 그때 전도관을 건설하는 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라 많은 교인들이 그곳에서 벽돌을 나르며 건설 일을 도왔습니다. 저도 한번씩 그 일에 참여하곤 했었는데 작업 도중에 주셨던 생수빵이 얼마나 맛있었는지 그때부터 빵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난 1957년 4월에 드디어 웅장한 이만제단이 완공되었습니다. 당시 제단 옆에는 생명물을 축복하시는 장소도 마련되어서 물이 가득 찬 커다란 물통을 향해 박 장로님께서 “쉭! 쉭!” 하시며 축복을 해 주셨습니다.

사범학교 3학년이던 1957년 여름방학 때 저는 대구에 사는 친한 언니(정명조) 집에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지내는 동안 대구제단 교인인 명조 언니와 함께 대구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대구 교인 중에는 얼굴이 곱고 얌전한 20대 아가씨가 있었는데, 한번은 그분과 대화를 나누던 중에 놀라운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자신은 원래 다리를 쓰지 못하는 앉은뱅이였는데 하나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이렇게 걷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앉은뱅이였다는 것을 전혀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로 정상적인 모습이어서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분은 예배를 마친 후에도 자리에 남아서 눈물을 흘리며 간절히 기도드리곤 했습니다.

대구에 계속 머물던 어느 날, 하나님께서 대구전도관에 오셨을 때 저는 처음으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제 눈에 살짝 손을 얹으실 뿐인데도 얼마나 아프던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속에 있는 죄가 성신에 대항할 때 그런 통증을 느낀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듣게 되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하나님께서 경북 경산전도관에 가신다고 하여 명조 언니와 같이 경산으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강대상을 치시는 순간, 뽀얀 먼지 같기도 하고 안개 같기도 한 것이 확 일어나면서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강대상에 먼지가 쌓인 줄 알고 언니에게 이야기했더니, 언니는 “단상 청소를 얼마나 깨끗이 하는데 먼지가 쌓이겠니. 저게 바로 이슬 같은 은혜야.”라고 했습니다. 제단에 다니면서 이슬은혜를 보았다는 이야기를 여러 사람에게 들었는데 그때 제 눈으로 직접 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 후 설교 말씀을 계속 들으면서 성경 호세아서에 기록된 대로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분이 곧 감람나무”라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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