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끝, 땅 모퉁이, 해돋는 곳’에 오신 ‘동방의 한사람’ 깨달아
진하옥 집사(2) / 기장신앙촌집회 마지막 날 박 장로님께서는 다니던 교회를 잘 섬기라고 하시며, 헌금하고 싶은 사람은 다니던 교회에다 하라고 하셨습니다. 집회가 끝나고 저는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서 제가 받은 은혜를 소상히 적은 후 임실 장로교회에 헌금을 해 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도 순천에서 열린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셔서 은혜를 받으시고, 저와 똑같은 마음으로 이미 임실교회에 헌금하셨다는 답장을 보내오셨습니다. 그때 그 기쁨을 무어라 형용할 수가 없었습니다.
천국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지옥 같은 마음이
이슬 은혜로 씻어지면 마음의 천국을 이루게 된다는 말씀 듣고
그 순간 저는 `그래 바로 이게 정답이다`하고 무릎을 쳐
여고를 졸업하고 고향에 내려와 임실 장로교회에 나갔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들었습니다. 교인들이 “박태선 장로가 교만해져서 그 큰 은혜도 다 떨어지고 총회에서 이단이라고 잘렸다.”라면서 박 장로님 집회는 가지도 말고 보지도 말고 듣지도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군산의 이모님 집에 갔다가 군산전도관 개관집회가 열린다는 포스터를 보게 되었습니다. 전도관은 박태선 장로님께서 세우시는 곳으로, 군산전도관에 직접 오셔서 집회하신다고 하기에 길을 물어물어 찾아가 보았습니다. 문 앞에서 안내하는 분이 친절히 안내해 주어서 단상과 가까운 좋은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날 박 장로님께서는 성경상의 ‘삼층천(고후 12:2)’에 대해 말씀하시며 “첫째 천국은 마음의 천국이요, 둘째 천국은 낙원이요, 셋째 천국은 영원한 하늘나라”라고 하셨습니다.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못하리니 네 마음속에 있나니라 – 지옥 같은 마음이 이슬은혜로 씻어지면 마음의 천국을 이루게 됩니다.” 그 순간 저는 ‘그래! 바로 이게 정답이야.’ 하며 저도 모르게 무릎을 탁 쳤습니다. 제가 임실 장로교회의 안봉걸 목사에게 삼층천에 대해서 질문했을 때, “하옥아! 하나님 말씀은 무조건 믿어야 된다. 그렇게 따지면 안 돼. 저기 보이는 하늘이 1층천이고 더 올라가면 2층천이 있고 최고로 높은 곳이 3층천이야.”라고 대답하여 너무 어이가 없었는데, 박 장로님의 명확한 해답을 듣고 보니 속이 다 후련해졌습니다. 이토록 분명하게 깨우쳐 주시는 분을 기성교회가 모략중상하여 참길을 가로막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집에 가면 나도 장로교회를 끊어 버리고 전도관이 세워질 때까지 기다리자고 결심하며 그날 예배를 마쳤습니다.
이모님 댁으로 돌아와서 초인종을 눌렀더니, 이모님이 노한 얼굴로 나오시다가 저를 보시고는 멈칫하며 놀라셨습니다. 이모님의 말씀인즉 제가 저녁때까지 돌아오지 않아 야단을 하시려고 단단히 벼르고 있었는데, 문을 여는 순간 제 얼굴이 너무나 환해서 놀랐다고 하셨습니다. 이모님은 집회가 끝날 때까지 제가 원하는 대로 새벽과 저녁 예배에 모두 참석하라고 허락해 주셨습니다.
얼마 후 서울에 사는 숙모님 집에 갔더니 숙모님 역시 전도관에 다니고 계셨습니다. 그때 마침 하나님께서 무더기 심방(하나님께서 서울 시내 구역별로 각 가정을 심방하실 때 사람들이 수백 명씩 무더기로 따른다 하여 붙여진 별칭, 영적 수도 공사라고도 하셨음.)을 하신다며 같이 가자 하시니 저는 계속되는 행운에 기쁨을 억제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돈암동제단에서 예배를 인도하시며 이사야 41장의 동방의 1인에 대해서 조목조목 쪼개시는데 ‘땅 끝, 땅 모퉁이, 동방의 해 돋는 곳에 오신 동방의 1인’이심을 밝히셨습니다. 동방의 1인은 타작마당에서 도리깨를 쥐고 밀알 까부르듯 까불어서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존재라 하실 때, ‘그래, 알곡과 쭉정이를 가르는 때니 이제 1초가 바쁘다. 더 이상 전도관이 생길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우리 집을 전도관으로 세우자.’ 하고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우선 고등학생인 남동생을 설득하기로 마음먹고, 하나님 설교집 1, 2집을 주면서 제 뜻을 이야기했습니다. 남동생은 원래 반듯하고 곧은 성품인 데다 하나님 집회에 참석한 적이 없었기에 제 생각이 너무 지나치다고 여기지 않을지 조심스러웠습니다. 그런데 동생이 설교집을 단숨에 읽고 나더니 “누님, 여기가 참 진리입니다. 우리 집에 전도관을 세웁시다.” 하며 흔쾌히 말하였고 어머니 또한 100% 찬성이셨습니다. 남동생은 그날 밤을 꼬박 새워서 설교집 표지에 있는 하나님 사진을 정성껏 그려 액자에 모셔 놓았고, 목재소에서 간판 목재를 다듬어 “임실전도관”이라는 간판을 걸었습니다. 방을 터서 마루를 넓히니 6, 70명 정도 예배드릴 수 있는 공간이 되어 그곳에서 1957년 6월 2일 처음으로 주일예배를 드렸습니다. 이전에 순천 집회에 참석했던 이옥례 집사님이 어린아이를 업고 오셔서 저희 식구까지 5명이 모인 것이 임실전도관의 시작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