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 시간에 향기가 진동하고 안개같은 것이 뽀얗게 내려
유영애(1) / 기장신앙촌저는 1933년 전라남도 광양군 봉강면의 시골에서 5남매 중 첫째로 태어났습니다. 저희 가족은 농사를 지어서 먹고사는 데에 걱정이 없었으며 온화한 성품의 부모님 슬하에서 화목하게 지냈습니다. 아버지는 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으셨으며 어머니는 일꾼을 부려 농사를 지으시고 종갓집 맏며느리로 1년에 열세 번씩 있는 제사를 준비하셨습니다. 딸이 넷인 저희 집안에서 외아들인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눈이 좋지 않아 온 가족이 걱정을 했습니다. 눈이 자주 충혈되어 핏발이 서고 까만 눈동자에 하얀 점 같은 것이 생겨서 없어지지 않았는데, 그때는 안과 병원이 드물어서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1956년 어느 날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종갓집 외아들인 남동생은
어려서부터 눈이 좋지 않아
눈동자에 하얀 점이 생겼는데
여수집회에 참석한 후 하얀 점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와
당시 보성군 벌교읍으로 시집가서 살고 있던 저는 어느 날 친정에 다니러 왔는데, 남동생을 보니 눈동자에 있던 하얀 점 같은 것이 깨끗이 사라지고 정상으로 돌아온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어떻게 나았냐고 여쭤 보니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에 참석해서 나았다고 하셨습니다. 어머니는 박 장로님의 집회에서 병이 낫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듣고, 박 장로님께서 여수에서 집회하실 때 혹시나 낫지 않을까 기대하며 동생을 데려갔는데 정말로 깨끗이 나았다고 하셨습니다.
박장로님 집회에 다녀오신 후 어머니는 항상 찬송을 부르며 즐거워 해
“박장로님 집회에는 은혜가 내리더라. 예배 시간에 시원한 물이
머리 위에서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들더라”고 증거해
그렇게 박 장로님의 집회에 다녀오신 후로 어머니는 항상 찬송을 부르시며 즐거운 모습이셨습니다. 원래 종교에 별로 관심이 없는 분이었는데 그때부터는 찬송이 입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박 장로님 집회에는 은혜가 내리더라. 예배 시간에 시원한 물이 머리 위에서 온몸으로 쏟아져 내리는 느낌이 들더라.” 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시며 활짝 웃으시는 모습이 정말로 기뻐 보였습니다. 저는 은혜가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머니가 웃으시는 것을 보니 덩달아 기분이 좋아지며 은혜를 받으면 저렇게 기쁜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가 1956년 4월경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저희 남편이 26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평소 자주 배가 아프다고 하던 남편은 어느 날 갑자기 복통이 심해져서 방바닥을 뒹굴며 아파했는데, 20리나 떨어진 읍내 병원으로 가던 도중에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혼자서 어린 아들을 키우며 친정의 도움을 받게 되었고 아들과 함께 친정에 가서 몇 달 동안 지내기도 했습니다.
여동생은 꿈속에 나타나신 분이
광양전도관에서 뵌 박 장로님
이었다며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에도 10리나 되는 산길
걸어서 새벽예배 드리러 가
한번은 친정에 갔더니 부모님을 비롯해 동생들이 모두 ‘광양전도관’이라는 곳에 다닌다고 했습니다. 전도관은 박태선 장로님께서 세우신 교회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스물한 살이던 여동생(故 유순애 집사)은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어느 날 꿈속에서 키가 훤칠하신 신사 분이 저희 집에 오셔서 식구들의 이름을 물어보셨다고 했습니다. 흰옷을 입으신 그분이 아주 귀하신 분일 거라는 생각이 들어 꿈에서 깬 후에도 잊히지 않았는데, 나중에 광양전도관에 가서 박 장로님을 뵈었더니 자신의 꿈에 나타나신 분이 바로 박 장로님이었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 순애는 꽁꽁 얼어붙는 한겨울에도 10리나 되는 산길을 걸어서 새벽예배를 드리러 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남동생과 함께 광양제단 근처에 집을 구해 살면서 더욱 열심히 제단에 다녔습니다.
저는 친정에서 몇 달 동안 지내면서 식구들과 함께 광양제단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교회에 다녀 보지 않아서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는 것 하나하나가 전부 새롭게 느껴졌습니다. 광양제단 교인들은 각자 은혜를 받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박 장로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면 좋은 향기가 진동하고 안개와 같이 뽀얗게 은혜가 내려서 앞에 앉은 사람이 보이지 않을 정도라고 했습니다. 저는 그런 일들이 신기하게 느껴져서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좋은 집을 두고 신앙촌 가는
것을 의아해 하는 이웃들에게
어머니는 세상에서 신앙촌보다
좋은 곳은 없다고 대답해
1957년 가을 무렵이 되자 어머니는 신앙촌에 들어가고 싶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경기도 부천에 신앙인의 마을을 건설하신다면서 저에게도 같이 입주하자고 하셨습니다. 광양제단 전도사님도 ‘신앙촌은 하나님의 은혜 속에서 사는 곳’이라는 말씀을 하셔서 저는 신앙촌에서 살면 참 좋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식구들과 교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면 한없이 기쁘고 즐겁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저도 그 귀한 은혜 속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 후로 저는 계속 친정에서 지내며 예배에 빠짐없이 다녔습니다. 설교 시간에 설명해 주시는 성경 구절이나 박태선 장로님의 설교 말씀을 다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은혜의 마을에서 살고 싶은 마음은 날이 갈수록 간절해졌습니다. 그 이듬해인 1958년 1월 전도사님이 저희 가족을 입주자로 추천해 주셔서 드디어 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고향 집을 정리하느라 얼마 후에 오셨는데, 트럭에 이삿짐을 싣고 신앙촌으로 오던 날 어머니는 기쁜 마음에 계속 찬송가를 불렀다고 하셨습니다. 그때 저희 집이 기와집으로 새로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이웃들은 좋은 집에서 살지 않고 떠나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습니다. 왜 신앙촌에 가느냐고 묻는 이웃들에게 어머니는 세상에서 신앙촌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하셨습니다.
(유영애님 신앙체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