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몸이 되신 중에도 가지들의 어려움을 걱정하신 하나님
최용득 승사(2) / 덕소신앙촌<이어서>
그로부터 얼마 후, 박 장로님께서 원효로에 예배처를 마련하고 예배를 인도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예배를 보러 갔습니다. 그곳 역시 사람들로 차고 넘쳤습니다. 새벽예배가 끝난 후 박 장로님께서는 모든 교인들에게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어 누우니 눈 안찰을 먼저 해 주셨습니다. 이어 배에 손을 대시더니 “혈기가 좀 있구만.” 하시며 안찰을 해 주시는데 그냥 손만 대시는데도 어찌나 쓰리고 아픈지 다 끝났다며 일어나라 하시는데도 단번에 일어나기가 힘들 정도였습니다. 쓰리고 아픈 배를 잡고 집에 도착하여 옷을 들춰 보니 신기하게도 손가락 모양대로 검게 자국이 나 있었습니다.
그 후 저는 다니던 연구소를 그만두고 목형 공장이 모여 있던 원효로 1가에 조그만 공장을 하나 차리고 원효로제단에 계속해서 나갔습니다. 하나님의 예배에 참석하여 향취의 은혜를 받으면 제 물건에서까지 향취가 나기도 하였습니다. 이를테면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손수건에서 향취에 배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는 둘째 아이의 고질적인 귓병이 심해져서 밤에 잘 때 향취가 나는 손수건을 귀에 덮어 주었는데 다음 날 아침에 보니 감쪽같이 나은 것이었습니다. 당시 기성교회에 다니던 처사촌이 저희와 같이 살며 공장 일을 도우고 있었는데, 이를 목격하고는 그렇게 오래 앓던 병이 향취 나는 손수건 하나로 낫느냐며 신기해하였습니다.
큰아들이 다섯 살 되던 해의 일입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어느 날부터 간질 증세를 심하게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세브란스병원까지 찾아갔는데 특별한 약도 없고 어떻게 고칠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걱정이 태산 같은 가운데 결국 하나님의 권능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에 집사람과 상의하여 서로 번갈아 아이를 업고 새벽제단에 다니기로 하였습니다.
그렇게 약 5일째 정도 되는 일요일 새벽예배 때였습니다. 당시 하나님께서 평일은 지방 순회 집회를 하시고 일요일에는 직접 새벽예배를 인도하실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찬송을 한창 부르시며 단상을 내리 치시자 뽀얀 안개와 같은 이슬성신이 나오더니 뜨거운 바람과 함께 ‘확’ 하고 저에게로 밀려오는 것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무릎 위에서 곤하게 자고 있던 아이가 꿈틀하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하나님께서 이 아이에게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아이 얼굴을 들여다보니 정말로 얼굴이 환하게 피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습니다. 그 후 간질 증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사라졌고 건강하게 자라났습니다. 너무나 감사할 따름입니다.
1957년 12월경 하루는 제단에서 소사신앙촌에 입주할 사람을 모집한다고 하기에 12월 말에 입주하였습니다. 이듬해 1월 4일 하나님께서는 입주자들을 부르시더니 모인 사람들을 안찰하여 주셨는데 그때는 처음과 달리 통증은 전혀 없고 평안하기만 하였습니다.
입주 후 저는 전에 밖에서 쓰던 목형 기계를 가져다가 영선반 한쪽에서 목형 공장을 운영하였고, 신앙촌 내 주택이나 아파트를 지을 때 들어가는 문손잡이를 직접 만들어서 공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해 가을 하나님께서는 철공장을 세우셨고, 목형 공장과 놋쇠 주물 공장은 그곳으로 편입되었는데, 공장에서 일하고 있으면 하나님께서는 현장에 종종 오셔서 축복을 해 주시며 “잘돼?” 하고 물으시곤 하셨습니다. “예.” 하고 말씀드리면 “잘해야지.” 하시며 다시 축복을 해 주시던 기억이 납니다. 하나님의 관심과 사랑 속에 공장은 나날이 발전해 나갔습니다.
그러나 1958년 12월, 하나님께서는 기성교단과 정치권의 박해로 인해 영어의 몸이 되셨고 공장 가동이 이전과 같지 못하게 되어 근무자들의 생활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때때로 먹을 것을 걱정해야 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하루는 집에 돌아오니 쌀 한 가마니와 연탄 50장이 놓여 있는 것이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알아보니, 저에게 한강 집회에 같이 가자고 하였던 김 집사님의 부인 꿈에 하나님께서 오셔서 “지금 생활하기 어려운 교인이 있으니 찾아가 보라.”고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일까 고민하던 중 문득 저희 집이 생각나서 쌀과 연탄을 사 가지고 왔다는 것이었습니다. 영어의 몸이 되신 중에도 오히려 저희 가지들의 어려운 사정을 걱정하시는 하나님이셨습니다.
얼마 후 영어의 몸에서 풀려나신 하나님께서는 공장 대표들을 불러 눈과 배에 안찰을 해 주시고 만찬을 베풀어 주셨는데 진수성찬을 차려 주시고는 “다 먹고 더 먹으라.”며 격려를 하여 주셨습니다.
저희는 다시 생산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였고, 저희가 만든 상품은 모두 인기가 좋았습니다. 그중 특히 유명했던 것은 제과 공장에서 만들어내던 벌꿀 캐러멜이었습니다. 당시 꽤 비싸던 포장 기계를 들여와서 대량생산을 하기 시작한 것인데, 그때의 생산량은 여느 대기업 못지않았습니다.
1962년 저는 식구들과 함께 덕소신앙촌에 입주하였습니다. 그 이듬해 여름, 저녁 늦게 철공장 간부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전화를 주셔서 저희를 부르시더니 “오, 애쓰지.” 하시며 축복을 해 주셨고 “덕소에서는 제강 공장을 작게 하고 저 남쪽에 가서는 크게 하겠다.”라고 말씀하시며 제강 공장을 차려 주셨습니다. 당시에는 그 말씀의 뜻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습니다만, 나중에 기장신앙촌이 생기고 그곳에 대규모 제강 공장이 들어서는 것을 보고서야 그 말씀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