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방의 해돋는 곳 한국은 복 받은 나라’라는 말씀에 감명

홍창홍 승사(1)/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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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1942년 함경남도 함흥에서 4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8.15 해방 후에 온 가족이 월남하여 서울에서 살았는데, 1950년 육이오전쟁이 일어나면서 부산으로 피난을 가게 되었습니다. 어머님께서는 월남한 후부터 장로교회에 꾸준히 다니셨으며 저도 어머니를 따라 가끔씩 예배에 참석하곤 했습니다.

부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한 저는 서울의 고모님 댁에서 지내며 중학교에 다녔습니다. 그러던 1955년, 장로교인이신 고모님(故 홍해일 권사)이 남산에서 열리는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에 다녀오신 뒤로 박 장로님의 집회에 자주 참석하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부터는 박 장로님께서 세우신 ‘전도관’에 열심히 다니시며 저에게도 같이 가자고 권유하셨는데, 저는 별로 관심이 없어 나가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고모님이 “박태선 장로의 이적과 신비경험”이라는 설교집을 주셔서 읽어 봤더니, 윤치영 의원과 임영신 총장 등의 저명인사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박 장로님께 은혜를 받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막연히 ‘박 장로님이라는 분이 보통 분은 아니신가 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서울 이만제단 낙성집회 때 내리는 이슬성신 (1957년 4월 30일)

이듬해인 1956년에는 부산에 있던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를 오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 어머니는 고모님의 전도를 받고 전도관에 다니셨으며, 얼마 후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는 전도관의 전도사님과 교인들이 오셔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전도사님은 박 장로님께서 축복하셨다는 ‘생명물’을 시신에 발라 드렸는데, 예배를 드린 후 할머니의 모습을 보니 생전의 주름살이 펴지고 피부색이 뽀얗게 되어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숨을 거두신 후에 뻣뻣하게 굳어 있던 몸이 예배를 드리고 나자 노긋노긋 부드러워져서, 살아 계신 분처럼 앉혀 놓고 팔다리를 움직이며 수의를 입혀 드렸습니다. 전도관 교인 분들은 시신에 은혜가 임하면 이렇게 아름답게 핀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믿으신
고모님과 어머니가
전도관에 가자고
갖은 모양으로 권면했으나
별 관심이 없다며 거절해

그 후 1957년 2월 제가 경기고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열이 40도를 오르내리며 심하게 앓은 적이 있었습니다. 일주일을 앓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 어머니께서 말씀하시기를, 백방으로 치료해도 낫지 않다가 고모님이 아껴 둔 생명물을 먹이니 열이 내리고 정신을 차렸다고 하셨습니다. 그때부터 고모님과 어머님은 저에게 전도관에 나갈 것을 더욱 적극적으로 권유하셨는데, 저는 생명물이 그저 신기하게 느껴질 뿐 전도관에 나가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습니다. 그런 저를 보고 두 분은 몹시 안타까워하시며 “이만제단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으니 구경이라도 한번 해 봐라.” 하시면서, 한 번 가 보고 다시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 간곡한 권유에 못 이겨 저는 1957년 9월 두 분을 따라 이만제단으로 향하게 되었습니다.

원효로 전차 종점에서 얼마를 걸어가니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하얀색 교회 건물이 눈에 들어왔으며, 높은 종각에서 울리는 은은한 음악 종소리가 멀리까지 울려 퍼지고 있었습니다. 전도관으로 향하는 언덕길 양쪽에는 깨끗한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줄지어 서서 나이 드시고 거동이 불편한 교인들을 부축하여 현관 앞까지 안내해 드렸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조금도 힘든 기색 없이 서로 먼저 도우려고 하는 모습이 보기에 참 좋았습니다.

현관 앞에 도착해 안내원에게 처음 왔다고 이야기하자 학생들 좌석인 3층으로 친절하게 안내해 주었습니다. 그때 이미 제단 안은 1층부터 3층까지 수많은 교인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잠시 후 박태선 장로님께서 등단하셔서 찬송을 인도하시는데, 찬송을 할 때 손뼉을 치는 것을 처음 봤던 저는 그 모습이 생소하고 낯설게 느껴졌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께서 성경 구절을 풀어 주시는 말씀을 이해하기가 어려웠지만, 그 큰 제단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힘차게 설교하시는 모습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후로 몇 번 이만제단의 주일예배에 참석했는데 하루는 학생회 임원이 저에게 학생회 가입을 권유했습니다. 그 임원이 ‘예배에 꾸준히 나오면 말씀을 깨닫게 되고 축복도 받을 수 있다.’라는 말에 마음이 이끌린 저는 학생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그때부터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으며 안내와 성가대 등의 학생회 활동에도 참여했습니다.

이만제단이라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교회가 있는데
한번 와 보고
다시 안 나와도 좋으니
나가보자는
간곡한 권유에 못이겨
제단에 출석

저는 계속 예배에 참석하면서 말씀이 하나씩 이해되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박 장로님께서는 ‘내가 성경상의 동방의 의인이며 감람나무다.’라고 증거하시며 관련되는 성경 구절을 풀어 주셨습니다. 이사야 41장에 기록된 대로 ‘동방의 한 사람’이 나타나는 ‘동방의 해 돋는 곳’은 바로 한국이라고 하셨습니다. 특히 “우리 한국이 복 받은 땅입니다.”라고 하실 때 저는 마음 깊이 감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한창 사춘기였던 저는 전쟁을 겪은 후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의 모습에서 심한 좌절감을 느끼고 있었는데, 그 말씀을 듣고 보니 ‘그렇구나! 귀한 분이 나타나셨으니 우리나라는 복 받은 땅이구나!’ 하면서 마음이 기쁘고 힘이 솟아올랐습니다.

그 후 저는 1957년 겨울에 소사신앙촌에 가서 처음으로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차례대로 안찰을 받는 가운데 앞 사람들이 안찰받는 광경을 보니, 박 장로님께서 가볍게 손을 대시는데도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지르고 발버둥을 쳤습니다. 제 순서가 되어 박 장로님 앞에 갔을 때 어디서 나는지 아주 향긋하고 좋은 냄새가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쉭!” 하시며 두 눈에 살짝 손을 대시는데 눈알이 빠질 것같이 아팠습니다. 배를 안찰하실 때는 구석구석을 송곳으로 찌르는 것처럼 아파서 발버둥을 치며 저도 모르게 “용서해 주세요.” 하고 말씀드렸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왜 이렇게 고집이 센가?” 하시며 저의 죄를 하나하나 지적하신 후 “이게 빠져야 한다.”라고 하셨습니다.

처음 안찰을 받을 때
박 장로님이 두 눈에
살짝 손을 대시는데
눈알이 빠질 듯이 아프고
배는 구석구석 송곳으로
찌르듯이 아팠는데
조금 지나자
눈과 가슴 속이 시원해지며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어

마지막으로 머리를 ‘탁’ 치시고는 “됐어. 앞으로 죄짓지 말라.”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안찰을 받고 저는 창피한 마음에 정신없이 밖으로 나왔는데, 아픈 통증이 남아 있어서 잠시 동안 가만히 앉아 있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통증이 사라지고 가슴 속이 시원해지면서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같이 간 친구에게 이야기했더니, 제가 안찰받을 때 맡았던 좋은 향기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이며, 안찰을 통해 성신으로 죄가 소멸될 때에 그런 통증을 느낀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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