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신이 마음에 감동함을 주시어 가능하게 되는 전도”

<487회> 진영섭 퇴임관장(2)/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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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7년 4월 30일 이만제단에서 이슬성신이 폭포수같이 내리는 모습

대전 전도관에서 하나님께 처음 안찰을 받고 나왔을 때가 떠오릅니다. 햇살이 비치는 것처럼 고요하고 평안해졌던 그 순간이 지금도 눈앞에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르며 평안한 마음이 다시 찾아오는 듯해 미소가 지어집니다. 그 후 저는 놀라운 성신의 권능을 깨닫고 은혜받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빠지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나님 집회는 물론 연무대 전도사님과 소사, 덕소신앙촌의 역사적인 건설 현장을 둘러보기도 하고 신앙신보를 전해주시면 글자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정독했습니다. 전도관에서 발행되는 신앙신보에는 전국 전도관 소식과 은혜의 말씀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하루는 신앙신보에 있던 하나님 말씀을 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꿀같이 단 것이 입안을 감돌았고, 말씀을 읽을수록 단물이 계속 목으로 꿀꺽 넘어가면서 마음마저 기뻐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란 저는 신앙신보가 단순히 소식만을 전하는 신문이 아니라 ̒더 큰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 신앙신보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고 그 속에 담긴 말씀대로 실천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습니다.

하나님 은혜의 권능으로 보호하심에 감사드려
1964년 저는 입대하기 위해 논산 육군훈련소로 가게 되었습니다. 30개월이라는 짧지 않은 군 복무 기간 동안 신앙생활과 멀어질까 봐 염려가 되었지만, 기도로써 구하면 도와주시리라 생각했습니다.

훈련소에 입소해 하루하루 훈련에 임하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일과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군화를 벗었는데 한쪽 발바닥이 조금 아픈 것이었습니다. ̒좀 쉬면 괜찮아지겠지 ̓ 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는데 조금 지나자 발바닥이 점점 부어오르면서 통증까지 심해졌습니다.

그때 논산 훈련소에서 복무하고 있던 전도관 식구가 저희 내무반으로 찾아왔습니다. 휴가 때마다 연무대 전도관에 들르곤 해서 잘 알고 지내던 노 일병님이었습니다. 이번 휴가 때도 연무대 전도관에 갔다가 제가 논산 훈련소에서 교육받고 있다는 소식을 전도사님께 들었다고 하며 축복 캐러멜을 전해주었습니다.  그때 번뜩 축복 캐러멜을 아픈다리에 붙여두면 나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저는 축복 캐러멜을 납작하게 만들어 상처에 잘 발라 놓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서 발바닥을 살펴봤는데 놀랍게도 붓기가 싹 빠지고 전혀 아프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저도 신기했지만 제 옆자리에서 모든 것을 지켜봤던 정주락이라는 친구가 도무지 믿기지 않는다면서 어떻게 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국민학교 동창이자 훈련소 동기이기도 했던 주락이에게 하나님의 축복으로 병이 낫는 기사이적에 대해 이야기해 주며 이 캐러멜도 축복이 담긴 것이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주락이는 참 신기하다고 하며 전도관에 대해 더욱 궁금해했고 저는 훈련을 마치고 쉬는 시간마다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습니다. 그러다 주락이와 같이 향취 은혜를 맡기도 했습니다. 어려운 군 생활 속에서 신앙을 잘 지켜나가라고 힘을 주시는 것 같아 얼마나 기쁘고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 성전을 가꾸는 것은 전도의 첫 걸음
그 후 1966년 7월에 군 생활을 마치게 된 저는 군속(現 군무원)으로 차출되어 민간인 신분으로 군대에서 일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1967년에는 대전 삼관구로 발령을 받아 군속 생활을 하게 되면서 대전 전도관으로 다니게 되었습니다. 직장과 제단이 20㎞나 넘게 떨어져 있어서 매일 새벽예배는 가지 못했지만, 수요일과 일요일 예배는 빠지지 않고 다녔습니다.

1972년 1월쯤이었습니다. 대전 전도관 도관장님께서 저에게 교역자를 해보면 어떻겠냐고 권유해 주셨습니다. 여러모로 부족한 제가 잘 감당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되었지만, 전도를 통해 은혜받을 기회를 주신다는 생각이 들어서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1972년 2월 저는 준 전도사 발령을 받아 서천군 판교면에 있던 판교 전도관으로 가게 되었고, 5월부터는 정식 전도사로 교역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제 나이 서른한 살이었습니다.

판교 전도관은 공석 제단으로 교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건물 관리가 잘 안 된 곳이 있어서 제단 수리부터 하게 되었습니다. 먼저 언덕 위에 있던 건물 주변에 담장을 두르는 것부터 시작해 출입문과 외벽 도색을 마치고 예배실도 아늑하게 꾸며 두었습니다. 일요일이 되어 제단에 온 교인들이 깨끗하게 단장된 교회를 보고 무척 좋아했습니다.

그 후 마을 아이들이 하나둘 전도되어 제단에는 웃음꽃이 피어났고, 전도의 기쁨을 조금씩 알아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찬송가를 부르던 순간 백합꽃 향기보다 더 향기로운 향취가 코끝에 진동하더니 가슴속 깊이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제단 가득히 향취로 채워져 가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는데 마치 찬송 소리에 하나님께서 응답해 주시는 것 같았습니다.

“감람나무 가지에 나리는 이슬 가만히 기울이고 들어보세요. 이슬에 젖으면 향취가 나고 무럭무럭 자라서 저 천국으로~” 찬송을 부를수록 아이들의 얼굴이 활짝 피어나 보석같이 예뻐졌고 그때 하나님 은혜를 전하는 예배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전도에 더욱 애써야겠다고 다짐도 했습니다.

전도는 성신이 함께해 주셔야 가능함을 깨닫게 돼

<487회> 진영섭 퇴임관장(2)/기장신앙촌

판교면 시내에는 큰 규모의 장로교회가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장로교회는 여름방학 때가 되면 신앙교육에 수백 명의 청년이 참석해 연수 교육도 하고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대대적인 심방도 했습니다. 그러니 판교 대부분의 사람이 장로교회를 다니고 있을 것만 같았고, ̒전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 전도는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성신의 힘으로 가능하다고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습니다. 그러다 내 생각으로 ̒전도가 어렵겠다’며 가로막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되었고,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며 전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느 일요일에는 예배를 드리는 중에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놀라웠고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귀한 학생들이라는 생각에 집회에서 은혜받은 이야기며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의 권능에 대해 더욱더 힘차게 전했습니다. 차츰 학생들이 늘어나게 되었고 그것을 보면서 내가 아닌 성신이 함께해 주셔야 전도가 되는 것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하루는 어떤 아주머니가 힘없이 축 늘어진 아기를 데리고 다급하게 예배실로 들어오셨습니다. 판교 전도관에 다니고 있는 한두연(국민학교, 1학년) 학생의 엄마라고 하며 전도관에 찾아온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두연이의 두 살밖에 안 된 여동생이 어느 날 갑자기 병에 걸렸다고 했습니다. 병원에 가 보았지만, 병명을 알 수 없어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고 아기의 상태는 점점 나빠져 입원까지 했는데도 병명이나 원인도 찾지 못한 의사 선생님은 아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가라고만 했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는데 그때 언젠가 전도관에 다녀온 두연이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고 했습니다.

전도관에는 ̒박태선 장로님이 축복해 주신 생명물이 있는데 그것으로 아픈 사람들의 병이 낫게 된다.̓라는 말이었습니다. 경황이 없던 아주머니는 그것을 잊고 지내다가 갑자기 기억이 나서 오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 제발 아픈 아기 좀 낫게 해달라며 간곡하게 부탁하셨고 저는 급한 대로 가지고 있던 축복솜에 생명물을 적셔 아픈 왼쪽 다리에 발라주었습니다. 사실 아기의 다리는 살갗이 아니라 마치 비닐을 씌워 둔 것만 같았습니다. 그리고 아기의 비닐 같은 살갗과 여린 속살 사이에는 물 같은 것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벌겋게 드러난 살을 건드리기만 해도 아플 텐데 아기는 진이 다 빠졌는지 울지도 못했습니다. 그 모습은 너무나 가여웠습니다.

다음날이 되어 아주머니는 또 아기를 안고 찾아오셔서는 어젯밤 아기가 오랜만에 곤히 잠이 들어 한시름 놓게 되었다며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물을 아기에게 다시 발라 줄 수 있냐고 해서 생명물로 정성껏 닦아 주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은 축복일이어서 기장신앙촌에 간다고 하니 아주머니는 아기를 데리고 같이 갈 수 있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먼 길에 아픈 아기를 데리고 가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간절한 부탁에 함께 기장신앙촌으로 가기로 했습니다.

1973년 4월 축복일이었습니다. 여전히 힘이 없던 아기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안쓰럽고 걱정스러운 마음에 저는 눈에 생명물을 넣어주면서 기장신앙촌으로 갔습니다. 드디어 신앙촌에 도착해서 보니 그 날은 예배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서 안수를 먼저 해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안수를 받기 위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고 아주머니와 아기도 그 행렬 뒤에서 차례를 기다리게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예배까지 마친 후에 식당에서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안수를 받은 아기의 상태를 살펴보기 위해  업고 있던 아기를 책상위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런데 깜짝 놀랐습니다. 아침까지만 해도 물이 차 있던 아기의 왼쪽 다리가 어느새 다 말라서 딱지가 생겨 있었고 그 주변은 뽀얀 새 살이 올라온 곳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힘없이 누워만 있던 아기를 일으켜 세워주니 아장아장 걸어 다녔고, 밥은커녕 무얼 삼키지도 못했던 아기가 배가 고픈지 밥까지 다 먹는 것이었습니다.

보고도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습니다. 거짓말처럼 살아난 아기를 바라보던 아주머니는 이전의 근심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린 듯 날아갈 것 같이 좋아했습니다. 그리고 전도관의 박 장로님께서 아기의 머리에 손만 살짝 얹었다가 떼셨을 뿐인데 아기의 병이 다 낫게 되다니 참 신기한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하며 연신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판교면으로 돌아와서도 아주머니는 만나는 사람마다 전도관에 계시는 박 장로님께서 우리 딸을 살려주었다며 이야기했고 그 말을 들은 사람들은 다 죽어가던 아기가 건강해져 돌아온 것을 보며 너무나 놀라워했습니다. 산을 넘어 이웃 동네에서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니 제단은 사람들로 넘쳐났고 일요일 예배 시간이면 자리가 부족할 정도였습니다. 그뿐 아니라 전도관에 대해 이단 운운하며 갖은 비방을 늘어놓던 사람들까지도 전도될 정도였으니 그야말로 하나님 은혜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보게 되었고 성신의 권능에는 한계가 없음을 깨닫게 된 시간이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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