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권능이 이 곳에 함께하심을 보여주셔”

신앙체험기 기장신앙촌 진영섭 퇴임관장(3) 끝.
발행일 발행호수 2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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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쩍 말랐던 고인의 몸이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얼굴은 광채가 날 정도로 환하게 피어나
이 모습을 지켜 본 유족들은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며 무척 놀라워해
하나님의 권능이 천부교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셔서 무척 감사드려

<487회> 진영섭 퇴임관장/기장신앙촌

(지난 호에 이어)
부산 기장신앙촌이 완공된 1970년대 즈음, 당시 하나님께서는 매주 일요일이면 서울로 올라가셔서 예배를 직접 인도하시고 다시 기장으로 내려오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하나님께서 매주 일요일 다니셨던 그 길은 서울에서 기장신앙촌까지 왕복 3,000리나 되는 먼 거리였습니다. 덕소를 시작으로 서울에 있는 8군데 중앙 전도관과 인천 전도관을 거쳐 마지막 소사 오만제단까지 총 11곳의 예배를 인도하시고 기장신앙촌으로 가시는 것이었습니다. 감람나무 가지들에게 은혜를 주시려고 그 먼 길을 다니셨던 하나님의 사랑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감사함으로 제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그 후 저는 교역자로서 하나님 은혜를 전하는 전도와 사업에 더욱 열심을 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당시 기장신앙촌에서는 섬유, 화학, 제강, 식품공장 등에서 수많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었습니다. 신앙촌 제품은 보기 드문 우수한 제품이었기에 그때에도 국내외에서 큰 인기를 끌었습니다. 당시 제가 시무하고 있던 판교 지역에서도 신앙촌 제품은 무척 인기가 많아서 가지고 나가면 30분도 안 되어 다 팔릴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하루가 멀다 하고 제품을 주문했고, 다음날 새벽이면 간장, 비누 등 트럭 가득히 물건이 도착했습니다. 그 많은 제품을 창고로 옮겨놓기 위해 계속해서 계단을 오르락내리락하면서도 힘이 들기는커녕 몸은 점점 가벼워지고 마음마저 날아갈 듯 기뻤습니다. 은혜 받을 수 있는 귀한 일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뿐이었습니다.

판교에서 시무하던 시기에 또 하나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었는데, 1974년의 일로 기억됩니다. 어느 날 판교전도관에 다니던 학생 한 명이 학교를 마치자마자 제단에 찾아왔습니다. 학생은 억울한 표정으로 그날 있었던 일을 제게 설명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도덕을 가르치던 교감 선생님이 전도관은 교인들에게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을 먹이는 고약한 곳이라고 했다는 것이었습니다. 터무니없는 말로 전도관을 비방하니 학생은 너무 속상하고 분하다고 했습니다. 그 학생이 다니고 있던 판교중학교는 전도관 학생 30~40명이 다니는 곳이기도 했고, 왜곡된 사실은 반드시 바로잡아야겠다는 생각에 저는 다음날 아침 그 학교를 찾아가 교감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우선 교감 선생님에게 제가 판교전도관 전도사임을 밝히고 전날 학교에서 전도관을 비방한 사실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교감 선생님은 본인은 결코 그런 일이 없으며, 더군다나 수업 시간에 그런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며 펄쩍 뛰는 것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학생들 말로는 전도관에서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을 먹인다고 말씀하셨다는데, 제가 10여 년 넘게 전도관에 다녔지만 듣도 보도 못한 일입니다. 무슨 근거로 수업 시간에 그런 말을 하셨습니까?”라고 재차 물었습니다. 그러자 교감 선생님은 태도를 바꾸어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죄송하다고 했고, 다시는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하겠다며 머리 숙여 사과했습니다.

그리고 그날 학교를 마친 학생들이 찾아왔습니다. 학교에서 교감 선생님과 만나는 모습을 보았다며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려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기대감과 호기심이 섞인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는 학생들에게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며, 다시는 전도관과 생명물을 비방하는 일이 없을 것이라 안심시켜주니 무척 기뻐하며 돌아갔습니다. 그 후 학교에서 그런 일은 두 번 다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교감 선생님은 길을 가다가 저를 만나기라도 하면 허리 굽혀 정중히 인사까지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면서 신념을 가지고 용기 있게 움직이면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도와주신 다는 것을 확실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1975년 서천에서 시무할 때는 시찰장을 겸하게 되었는데, 시찰장은 그 지역의 전도와 사업을 책임지고 관리하는 지금의 도(道)관장과 같은 역할이었습니다. 저는 관할 지역의 사업을 확장하고자 충청도 일대를 다니며 사업 영역을 넓혀 나갔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대천, 홍성, 예산, 온양, 태안, 장항, 한산, 논산, 부여까지 충청도의 반 정도를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납품할 물건의 양이 늘어나 근처의 대한용역(現 대한통운) 창고까지 빌리게 되었고, 10t 트럭이 그대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넓었던 창고는 금세 간장, 제과, 비누 등 신앙촌 물건들로 가득 채워졌습니다. 저는 근처에 대천, 마석 전도관 관장님들과 함께 2.5t 트럭을 구입하여 신앙촌 제품을 알리기 위해 열심히 다녔습니다. 지역 곳곳마다 있는 큰 상점에는 신앙촌제품이 속속 들어가게 되었고 신기할 정도로 잘 팔려 사장님들이 물건을 더 보내달라고 아우성이었습니다.

그 후 1978년쯤에는 장항전도관 최 전도사의 시어머니가 병환이 깊어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시어머니는 군산에 있는 병원에 입원했지만 의사로부터 도저히 고칠 수 없다는 말을 듣고 집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했습니다. 저는 최 전도사에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기도해보자고 힘을 북돋아 주며, 시어머니를 위해 함께 예배를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최 전도사의 집에 가보니 시어머니는 배에 복수가 가득 차올라 몸이 절구통처럼 부어 있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찬송을 부른 뒤 시어머니의 입에 생명물을 넣어드리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예배를 드리러 다시 최 전도사님의 집을 찾아 갔을 때 깜짝 놀랐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복수로 부풀어있던 배가 쏙 들어간 것이었습니다. 병원에도 가봤는데 진찰했던 의사가 병이 다 나았다며 무척 놀라워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최 전도사와 시어머니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고, 이 일이 서천지역에 소문이 쫙 퍼지면서 그 지역 사람들이 많이 전도되었습니다.

그 이후에도 생명물로 인한 많은 기사이적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습니다. 1994년 대전에서 시무할 때였습니다. 공주에 사는 연관희 집사님은 병환으로 5년간 교회를 나오지 못하던 분이셨습니다. 안타까운 마음에 연관희 집사님 집에 심방예배를 드리러 가기도 했었는데, 집사님은 병을 오래 앓아서인지 피골이 상접하고 안색이 매우 안 좋으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집사님의 작고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저는 교인들과 함께 생명물을 들고 연 집사님의 장례식을 찾아가 입관 예배를 드렸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생명물로 정성껏 고인을 씻겨드리니 놀랍게도 비쩍 말랐던 몸이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피부가 환하게 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나중에는 얼굴에 광채가 나는 듯하고 주름도 사라졌으며, 자주색이던 입술이 연지를 바른 것처럼 고운 주홍빛을 띠는 것이었습니다. 뻣뻣했던 몸은 노글노글 부드럽게 움직여져서 쉽게 수의를 입힐 수 있었습니다. 이 모습을 천부교를 다니지 않는 연 집사님의 아들과 며느리가 보고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연 집사님의 아들은 제일제당의 실험실 과장이었는데 아름답게 피어난 아버지의 모습을 보고 자기가 아는 지식으로는 설명이 안 된다며 감탄했습니다. 며느리는 충남대 간호학과를 나온 분이었는데 이제까지 살면서 이런 놀라운 경험은 처음이라고 말했습니다. 시신이 피는 것은 생명물로 죄가 씻어진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입증되는 것이라 하셨는데, 하나님의 권능이 천부교에 함께하신다는 것을 연 집사님의 자녀들에게 보여주셔서 무척 감사했습니다.

종합식당 앞 벚꽃

2009년 부산에서 시무할 때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당시 저는 신앙생활을 쉬고 있는 교인들을 만나보기 위해 여기저기 연락을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박동식 권사님을 알게 되었는데 그분의 사정이 참 딱했습니다. 박동식 권사님은 식도에 구멍이 나서 투병 중이었는데 병원에서도 손 쓸 수 없다 하여 집에서 요양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박 권사님을 찾아가 다시 교회에 나올 것을 권고하며 새벽예배부터 나와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때가 1월이어서 날씨는 한창 매섭게 추웠지만 박 권사님은 느끼는 바가 있었는지 다음날 바로 새벽예배에 나오셨습니다. 박 권사님은 그 후 단 한번도 예배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는데, 한 달 후 저를 찾아와서는 눈물을 흘리며 그간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박 권사님의 말에 따르면 처음 새벽예배를 드리러 간 날 예배실 문을 열자마자 향취가 진동했다고 합니다. 예전에 신실하게 신앙생활을 했을 때 맡았던 그 향기였다고 했습니다. 그 향기는 집에 갈 때까지 계속 맡아졌고 박 권사님은 ‘하나님께서 날 버리지 않으셨구나’ 하는 생각에 한없이 눈물을 흘렸다고 했습니다. 그 후로 간절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생명물과 런을 꾸준히 먹었는데, 한 달 후 병원에 갔더니 진찰하던 의사가 매우 놀라며 도대체 무엇을 먹었길래 몸 상태가 이렇게 좋아졌냐고 물었다는 것입니다. 부산교회 식구들은 박동식 권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마치 자신의 일인 양 기뻐하였고, 이 일을 계기로 교인들의 마음이 모아지고 신앙심이 고무되어 교회 신축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기도 했습니다. 교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더욱 큰일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 일이었습니다.

은혜롭고 복된 일을 할 수 있었던 귀한 시간들을 지나 저는 교역 생활에서 은퇴하여 언제나 마음의 고향이었던 신앙촌에서 편안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신앙촌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이곳을 만들어주시기 위해 밤낮 쉬지 않고 애쓰셨던 그리운 하나님 모습과 지난 시간들이 떠오릅니다. 신기할 정도로 잘 팔려나가는 신앙촌 제품을 싣고 다니며 어딜 가나 반겨주는 고객들을 만나 즐겁게 판매했던 일, 생명물의 권능으로 불치의 병이 씻은 듯이 완치된 일,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전도되었던 일, 비쩍 말랐던 시신이 은혜로 화하여 살이 오르고 아름답게 피어난 일 등 하나님의 권능과 도우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그 은혜를 증거하고 전할 수 있었습니다. 전도는 내 힘이 아닌 성신으로 하는 것임을 몸소 체험했던 지난 날들을 가슴 깊이 새기며, 앞으로도 귀한 은혜 허락해주시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립니다. 아름다운 신앙촌에서 거할 수 있게 해주심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은혜를 간직하여 맑고 깨끗한 신념을 간직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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