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하나님 의지하고 가는 것이 최고야’

남삼호 관장(춘천교회), 남은성 학생관장(광주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2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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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한 사람은 강원도에, 한 사람은 전남에 있다. 한 사람은 60대, 한 사람은 30대. 거리만큼이나 세월의 차이도 만만찮다. 하지만 두 사람을 하나로 만들어 주는 것이 있다. 하나는 부자지간이라는 것, 또 하나는 같은 길을 걷고 있다는 것이다.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남삼호 관장(춘천교회)과 남은성 관장(광주 교회)이다. 지난 10월 축복일에 이들 부자를 만났다.

●아버지의 길
아버지 남삼호 관장은 경남 삼천포(現 사천)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부모님이 어디서 아들이 스무 살을 못 넘길 것이라고 들었다고 하였다.

어린 나이에 죽게 된다는 생각을 하니 도대체 기쁜 일은 없고 의욕이 없었다는 남 관장은 스무 살 때, 박 장로님의 집회에서 꼽추가 등이 펴지고 앉은뱅이가 일어선다는 권능의 소식을 이웃으로부터 전해 듣고 그날 곧장 전도관으로 달려갔다고 한다.

“워낙 수줍음이 많아서 전도관 앞까지는 갔으나 들어가지 못하고 한참이나 서성였습니다.” 아버지는 그렇게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그 후 교역자의 길에 들어섰다. 첫 발령을 받아 단에 선 것이 1968년 1월이니 벌써 40년이 흘렀다.

●아들의 길
아들의 아버지는 관장님이었다. 덕분에 아들은 초등학교 6년 동안 7번이나 전학을 했다. 아버지는 전학을 자주 다니게 되어 한편으로는 미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아들은 항상 밝고 적응을 잘 했다.
“어릴 때라 특별한 기억은 없었고, 그저 학교 마치면 교회 형들이랑 어울려 공부도 하고 놀기도 하며 재밌게 보낸 기억이 납니다.” 아들은 아버지와 교회에서 생활하면서, 향취로 은혜를 체험하고 생명물로 기쁨을 맛보며 자연스레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

그러다가 아들이 고1 때 아버지는 인천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고, 학교 문제 때문에 아들은 울산에 남게 되었다. “아버지가 안 계시니 여러 모로 힘들었습니다. 자연스레 신앙생활도 전같지 못했구요.” 그때부터 아들은 아버지와 다른 길을 생각하게 되었다.

●만남 1
그후로 아들은 축복일에나 겨우 참석할 정도가 되었고 아버지는 그런 아들이 안타까웠지만, 품 안을 떠난 자식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그러던 2004년 8월, 협회에서 몇몇 관장님들과 그 자제들을 함께 초청하는 행사가 있었다. 신앙촌을 견학하고 식사도 하고 대화의 시간도 가졌다. 끝날 무렵, 아버지는 아들이 교역의 길로 나섰으면 하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어릴 적부터 장차 시온의 일꾼이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고, 어렴풋이 그런 생각도 했지만, 정작 교역자가 되라는 권유를 받으니 빠져나갈 생각뿐이었습니다.” 아들은 일단 상황을 모면해볼 심산으로 건성으로 알겠다고 했다. 그런데 그때부터 마음의 혼란을 겪게 될 줄은 몰랐다. “어느 날은 ‘그래 이 길이 진리의 길이다, 힘들어도 이 길을 전하는 사람이 돼야지’라고 생각하다가 또 어떤 날은 ‘내가 감당할 수 있을까, 어려운 길 말고 평범한 길을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남 2
그해 11월 말 교역자 후보생 교육이 시작되었다. 마음이 다급해진 아버지는 서울에 있는 아들을 찾아 와 좋은 양복도 사주면서 달래보기도 하였지만 생각같지는 않았다. 교육이 시작되기 직전, 아버지는 ‘내 마음대로 하겠다’는 아들의 말에 수화기를 내려놓고 말았다.

그날 밤, 아들 또한 마음이 편치는 않았다. 그러다 아들의 눈에 ‘신앙신보’가 들어왔다. 일전에 아버지가 왔다가 두고 가신 것이었다. 무슨 맘에서인지 아들은 신앙신보를 펼쳤다가 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를 보고, 컴퓨터를 켰다. 신앙신보와 천부교 홈페이지를 둘러보던 아들은, 천부교 소개부터 클릭을 해 보았다고 한다.

“저도 그래픽 디자인을 했었기 때문에 홈페이지에 끌렸습니다. 교리부터 하나하나 읽어보는데 갑자기 흥미가 새롭게 생겼습니다. 어릴 때부터 많이 들었지만 마치 새로 배우는 것 같았습니다. 읽는 동안 끊임없이 궁금증이 생겼다가 풀리고… 그러다 한참 만에 ‘이건 도저히 인간이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무렵 새벽 동이 텄다. 아들은 밤새워 천부교 홈페이지를 샅샅이 살펴 본 것이었다. “동이 틀 무렵, 저절로 무릎을 탁 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너무 감격스러워 한참동안 눈물이 나면서도 기쁘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들은 어느새 전화기를 들어 아버지를 찾았다. 전화를 받은 아버지는 ‘지난 저녁에 전화를 끊고 못내 가슴이 아팠는데, 다음 날 아침 일찍 전화가 와서 당장 신앙촌에 가서 교육에 참석하겠다’하니 어리둥절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아들은 교역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아버지와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었다. 울산에서 인천으로 발령받아 아들과 떨어지면서 아버지는 아들 이름으로 줄곧 주정헌금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한다.

40년 ‘선배’로서 ‘후배’에게 하고 싶은 말을 묻자, “교역자는 힘이 다하는 순간까지 하는 것이라서 언제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잘나서가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아버지 남삼호 관장.

‘밤새 홈페이지를 읽고 나서 터트렸던 눈물과 감격, 기쁨을 잊지 않고 항상 순종하며 나아가겠다’는 아들 남은성 관장.

이들 부자가 만들어갈 교역일기가 벌써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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