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은혜는 합당한 자에게만 내리는구나’

발행일 발행호수 25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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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부교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였습니다. 아름답고 성결한 마음을 주시는 이슬성신의 은혜. 그러나 그 은혜는 누구에게나, 어느 순간에나 허락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번 테마로 보는 신앙체험기는 은혜를 받는 마음의 자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서울 이만제단 낙성집회 때 내리는 이슬성신 (1957년 4월 30일)

안타까운 심정으로 은혜를 구해야

1955년 6월, 알고 지내던 한 학생이 박태선 장로님의 부흥집회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슬 같은 은혜가 내리고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한다는데, 저는 어떻게 그런 일이 있겠나 하며 그 말을 믿지 않았고 오히려 의심쩍어했습니다. 하지만 그 학생이 계속 권유하여 ‘어떤 곳인지 한번 가 보기나 하자’는 생각으로 대구 칠성동 집회장을 찾아갔습니다.

집회장에는 눈물 흘리며 간절히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집회장에 빼곡히 모인 사람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안수해 주신 후 “병 나은 자는 다 일어나라!”고 외치셨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일어나 병이 나았다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했고, 집회장은 축제라도 열린 듯 기쁨과 환호가 넘치는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전혀 기쁘지도 않고 그저 맨송맨송하기만 해서 ‘여길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오니, 이웃집의 목사 한 사람이 제가 박 장로님 집회에 다녀온 것을 알고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오늘 어떤 은혜를 받으셨습니까?” 하고 묻기에 아무 은혜도 받지 못했다고 했더니,
“그렇게 향취가 나고 이슬은혜가 내리는데 하나도 체험하지 못했습니까?” 하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때까지 장로교회에 다니며 나름대로 진실하게 믿어 왔다고 생각했는데, 남들 다 받은 은혜를 나는 못 받았다는 사실이 너무나 속상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다시 집회장으로 발길을 돌리며 은혜를 받기 전에는 집에 돌아오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집회 기간에 박 장로님께서는 종종 “마음문 여세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저의 기도는 오직 마음을 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얼마나 더러우면 귀한 은혜를 못 받는 것인지, 그 안타까운 심정은 무어라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애타는 심정으로 간절히 기도를 드리니 흘러내린 눈물로 자리가 흥건히 젖어 있곤 했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 집회가 거의 막바지에 이른 날이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단상에 서셔서 “쉭! 쉭!” 하고 축복을 하시자, 박 장로님 입에서 뽀얀 안개가 퍼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개가 사람들에게로 오는 것이 너무나 또렷하게 보이는데, 어떤 사람에게는 한없이 내렸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전혀 닿지 않고 싹싹 피해 갔습니다. 그 신기한 광경에 저는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습니다. ‘아, 은혜는 합당한 자에게만 내리는구나. 은혜가 피해 가는 사람이 바로 나였구나.’ 절실히 깨닫게 되었고, 제가 그런 존재라고 생각하니 부끄럽고 안타까운 마음에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최온순 승사/ 기장신앙촌

화를 내는 순간 떠나시는 하나님 은혜

1957년 청주 전도관 개관집회에 참석하면서 그때부터 저는 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전도관에 다니면서 하나님의 은혜가 연결이 되고, 또 연결되었던 은혜가 끊어지는 것을 체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샘물에서 빨래를 하던 때였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기쁜 마음으로 빨래를 하는데, 입 안에 달고 시원한 물이 고이면서 그 물이 가득 차 꿀꺽꿀꺽 목으로 넘어가서 배 속까지 흐르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쁨이 오는데 그때의 느낌은 이루 표현할 수 없이 좋은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집에 돌아와 보니 딸 아이 둘이서 싸우고 있었습니다. 조용히 말로 타일러 보았지만 듣지 않고 계속 싸웠습니다. 아무리 해도 말을 안 들으니 저도 화가 치밀어 야단을 쳤는데, 그 순간 입 안에 단물 흐르던 것이 싹 없어져 버리고, 그 기쁘고 즐거웠던 것은 간 곳이 없어졌습니다. 혈기를 내는 순간 너무나 순식간에 하나님 은혜가 떠나버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날 밤새도록 저는 눈물로써 회개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떠나신 성신이 다시 저의 마음에 임하시기를 간절히 바라며 기도드렸는데, 일주일 만에 은혜가 다시 연결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너무도 정확하신 분이시라는 것과, 성신이 계속 거하실 수 있도록 그 조건을 만들어 은혜를 간직하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는 것을 그때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박병순 권사/기장신앙촌

간절함과 진실한 마음을 보시는 하나님

1960년 당시 제가 다니는 구포 제단은 흙벽돌로 된 작고 초라한 제단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저희 제단에 직접 모시고 싶어 고심하다가 당시 부산 도관장이었던 오성민 관장님께 가서 부탁했습니다. 하나님의 위신도 체면도 생각하지 않고 나 좋은 것만 생각하고 어린애처럼 졸랐습니다.

제가 다니던 제단의 장로님 한 분은 “이렇게 초라한 제단에 그대로 모실 수는 없고 이것저것 준비해야 할 텐데 금전적인 것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며 크게 반대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기에는 그 장로님 말씀이, 초라한 제단에 모시게 됨을 죄송하게 생각하는 마음보다는 인색한 마음이 앞서는 듯 느껴졌습니다. 오 관장님은 “내가 한번 말씀드려 볼게요.” 하셨는데, 며칠 후 “하 집사님, 단번에 허락하셨어요.”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우리 제단에 모신다는 생각에 너무 기뻐서 제단 구석구석을 정리 단장 하고, 포목집에 가서 감을 끊어 와 하나님 쓰실 방석도 만들었습니다.

모든 준비가 끝나고 하나님께서 오셨습니다. 좁은 제단에 식구들이 꽉 차게 앉아 있었는데 저는 이렇게 초라하고 불편한 곳에 하나님을 모시려 했던 것이 너무 죄송스러워 눈물만 났습니다. 예배를 드린 후, 남자부터 안찰을 해 주시는데, 하나님 모시기를 반대했던 그 장로를 어찌 아셨는지 안찰을 안 해 주시고 밀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자 안찰을 다 끝내고, 여자 안찰 하실 때는 저를 처음으로 오라고 직접 부르시며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안찰을 끝내고 쉬시며 하는 말씀이 “오 관장, 여기가 좋아. 나 가고 싶지 않은데.”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찌그러진 곳이지만 편안하셨나 봅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이곳을 떠나고 싶지 않다는 그 말씀만으로도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저는 하나님 모시기로 결정된 날부터 다녀가시는 날까지 너무 감사한 마음에 그렇게 눈물이 흐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말분 권사/동래교회

받은 은혜를 쏟지 않고 귀히 간직해야

1960년 교역자로 생활할 때 있었던 일입니다. 은혜를 받았을 때는 모든 생활이 즐거웠는데 신앙이 약해지니 불평이 나오고 의심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역자도 그만두고 집에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1960년 3월경 소사신앙촌에서 하나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하나님께 머리 숙여 인사드리면 안수를 해 주시기에, 저도 안수를 받으려고 하나님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러나 저만 안 해 주시고 비켜 가려고 하시기에 이쪽저쪽으로 따라가며 머리를 숙여 안수를 해 주시기를 바랐으나 끝내 저만 안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보고 빙그레 웃으니까 하나님께서 “전도사님! 웃음이 어디서 나옵니까. 기쁘십니까? 무엇을 받겠다고…….” 하시며 그냥 가셨습니다.

저는 그 자리에 주저앉아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울면서 양심의 소리로 가르쳐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은혜를 부어 주었는데 너희는 왜 은혜를 다 쏟아버리느냐.’ 그 소리는 며칠간 귀에 울릴 정도로 메아리 쳤습니다.

이 역사는 신의 역사인 고로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십니다. 1982년 마산제단에서 시무할 때 일입니다. 새벽예배 시간에 머리끝에서부터 시원한 생수가 흘러 넘치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습니다. 예배 후 전화벨이 울려 받아 보니 하나님께서 하신 전화였습니다. 첫 말씀이 “너 지금 받은 것 없느냐?” 하시기에 생수가 흘러 넘치는 은혜를 받았다고 말씀 드리니 “그 은혜를 간직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박정삼 /기장신앙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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