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집회에서 새생명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해
<486회> 박옥주 권사(1)/기장신앙촌놀라운 은혜로 간질병이 씻은 듯 사라지는 기사 이적을 체험하고
하나님이 계심을 깨닫게 되어 감사한 마음으로 새 삶을 살게 돼
1946년 전라남도 나주에서 8남매 중 넷째로 태어난 저는 농사를 지으시던 부모님 슬하에서 형제들과 오순도순 지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나 우리 가족은 피난을 가야 했지만, 당시 임신 중이셨던 어머니께서 먼 길을 가실 수 없어 그리 멀지 않은 광주 송정리역 근처에서 지내며 상황을 살피기로 했습니다. 어느덧 휴전이 되어 우리 가족은 송정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부모님께서는 집을 새로 단장하고 농사도 부지런히 지으셔 점점 농지를 늘려 나가셨습니다. 그렇게 일이 많아진 부모님은 다 늦은 저녁에나 들어오시는 일이 잦으셔서 유독 부모님 손길을 그리워했던 저는 일하고 계시는 논과 밭으로 찾아가 그곳에서 놀곤 했습니다. 그때가 제 나이 일곱 살이었습니다.
간질병으로 모든 것이 멈춘 듯한 시간
하루는 부모님께서 집과는 떨어진 산자락 근처 논에서 일하고 계셔서 그곳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부모님께 거의 다다랐을 때였습니다. 그때 수풀 옆에 눈이 움푹 파여 소름 끼치는 형상으로 있던 해골을 보게 된 저는 기겁을 하고 그대로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쫓아오신 부모님은 눈을 하얗게 뒤집은 채 심한 경련을 일으키고 있던 저를 발견하시고는 곧장 시내에 있는 큰 병원으로 달려가셨습니다. 그리고 의사 선생님에게 듣게 된 제 병명은 부모님의 억장을 무너지게 했습니다. 바로 간질이었습니다. 큰 충격에 의한 발작으로 간질이 발병해 평생 약을 먹어야 한다고까지 말해 부모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셨습니다.
당시 간질병은 사람들 인식도 너무나 좋지 않았기에 부모님은 제 병을 낫게 할 방법만 있다면 하늘 끝까지라도 가고 싶은 심정이라고 하셨습니다. 유명한 병원이라는 병원은 다 다니던 어느날 한의사 선생님이 제 맥을 짚더니 “하늘의 도움 없이는 나을 수 없다”고 하며 교회에 나가보라고 했습니다. 어머니는 대대로 불교 집안이었지만 그날부터 장로교회를 다니시며 간절히 기도드렸는데도 제 병은 좀처럼 낫지 않았습니다. 또 사람들이 귀신들린 병이라고 해서 굿까지 해보았지만 아무런 차도가 없었습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방팔방을 다 다니셨던 부모님은 점점 지쳐만 갈 뿐이었고, 하루에도 몇 번씩 느닷없이 찾아오는 간질 발작으로 고통스럽게 사지를 뒤트는 저를 가족들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지만, 여느 아이들처럼 입학할 수 없었던 저를 보며 부모님은 무척이나 안타까워하셨습니다.
열한 살이 되던 때였습니다. 나주에 살고 계시던 외할머니께서 갑작스럽게 우리 집으로 오셔서는 상기된 얼굴로 제 병이 나을 수 있는 방법을 찾은 것 같다고 하시며 나주 장로교회 목사님 이야기를 전해 주셨습니다. 장안의 화제인 박태선 장로님이 부흥집회를 하시면 수많은 사람이 은혜 체험을 하며 벙어리가 말문이 트이고 불치 병자들의 병이 낫는 등 기사 이적이 일어나는데 마침 광주에서도 집회가 열린다고 하니 꼭 가보라고 권유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외할머니는 거기에 가면 ‘우리 옥주의 병도 혹시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만사 제쳐두고 오셨던 것입니다. 그 말씀을 들으시던 어머니께서는 똑같은 말을 송정 장로교회 목사님께 전해 듣고 이미 집회에 참석할 준비를 하고 계셨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어머니와 외할머니를 모시고 함께 집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은혜받고 병이 나아 새 삶을 얻게 돼
아침 일찍 광주 시내로 가게 된 저희는 개관집회(1956. 9. 10~16)가 열리는 광주 전도관을 찾아갔습니다. 새롭게 지어진 크고 웅장한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예배실 안은 이미 많은 사람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새 안내하는 분이 오셔서 저희를 예배실 중간쯤에 앉게 해주셨습니다.
이윽고 말로만 들었던 박 장로님이 등단하셔서 찬송 인도를 해 주셨는데 저는 작은 키로 단상 앞이 잘 보이지 않아 아쉬운 마음이 들었지만, 박 장로님의 그 음성만큼은 매우 크고 우렁차게 느껴졌습니다. 이내 박 장로님께서는 단에서 내려오셔서 예배에 참석한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머리에 손을 얹으시면서 지나가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단에 오르신 박 장로님께서 ‘병 나은 자는 일어나라!’ 하고 외치셨는데 그때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제 옆쪽에 저만치 떨어져 있던 곳에서 한 사람이 천천히 일어서더니 “제 다리가 펴졌습니다.”하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앉은뱅이였는데 두 다리로 서게 되었다며 기뻐하는 것을 보고 사람들은 모두 놀라워하며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이번에는 단상 쪽에서 웅성웅성하는 소리가 들려서 돌아보니 마이크 앞에 선 사람이 자기는 벙어리였는데 은혜를 받아 말문이 트였다고 했습니다. 더듬거리며 말했지만,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찬송도 불렀는데 집회장의 수많은 사람이 그 모습을 보면서 손뼉을 치며 함께 기뻐했습니다.
너무나 신기해 눈을 떼지 못하고 바라보던 저에게 옆에 있던 어르신이 박 장로님께서 안수해 주시면 은혜를 받아 이런 기사 이적이 수없이 일어난다고 말해주셨습니다. 저도 그 순간들을 다 보면서 너무나 놀라웠고 ‘나는 왜 저 사람들처럼 병이 낫지 않는 걸까?’ 하고 속으로 생각하며 부러워하기도 했습니다.
집회는 밤낮으로 계속 이어져 5일째가 되던 날이었습니다. 어느덧 박 장로님께서는 단상에서 내려오셔서 집회장의 수많은 사람에게 안수해 주셨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비좁은 틈 사이를 빠르게 다니시며 한 명 한 명 안수해 주시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박 장로님의 손이 제 머리에 닿는 순간 머리끝부터 배꼽까지 뜨거운 불기둥 같은 것이 딱 꽂히는 것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너무도 생생한 그 느낌은 지금도 잊히지 않습니다. 마치 제 앞을 가로막고 있던 무언가가 벗겨져 나간 듯했던 그 순간. 저는 제 몸에서 간질병이 사라진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집회에서 은혜받은 이후 약 한번 먹지 않았고 칠십이 넘은 지금까지 간질 증세는 단 한 번도 재발한 적이 없습니다.
산후풍으로 뼈마디가 아프다고 하셨던 어머니께서도 박 장로님께 안수를 받으신 이후로는 병원에 가지 않으셔도 될 정도로 건강을 되찾으셨습니다. 어머니와 저는 집회 동안의 놀라운 체험을 통해 이곳에 분명히 하나님이 계심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귀한 은혜를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거듭 감사드려도 부족할 뿐입니다.
하나님을 깨닫고 복된 길을 가게 돼
그 후 어머니께서는 받은 은혜가 이렇게 확실하니 장로교회를 나가지 말고 전도관에 다녀야겠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희가 살고 있던 송정에는 전도관이 없어서 광주개관집회에 참석해 은혜를 받았던 마을 사람들과 어머니는 힘을 모아 송정에도 전도관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이내 정광 여자 중고등학교 주변 공터에 빨간 벽돌을 쌓아 올려 지은 아름다운 ‘송정 전도관’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이듬해 봄 저는 드디어 국민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비록 열두 살이라는 늦은 나이로 가게 된 학교였지만 건강하게 학교에 다닐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어머니와 저는 감사할 뿐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아버지께서는 일요일마다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못마땅해하셨습니다. 전도관에 가서 제 병이 나았을 때는 그렇게 기뻐하셨는데 무섭게 변해가는 아버지는 꼭 다른 사람이 된 것만 같았습니다. 한번은 주일이 되어 전도관에 가려는 어머니를 아버지가 파출소로 끌고 가셔서 교회에 못 가시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때 어머니는 당당한 목소리로 “저는 장손 며느리로 시집을 와서 시조부모님 병시중부터 대가족 살림에 농사일까지 여태 무엇 하나 소홀히 한 적이 없습니다. 그리고 피난길에 해산해 몸이 성한 곳이 없었던 제가 전도관에 가서 이렇게 건강해졌고, 내 딸도 간질병이 씻은 듯이 나아 감사한 마음뿐인데 그곳을 못 가게 하는 남편이 옳은 겁니까? 경찰관분들이니 판단해 주세요.” 하고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경찰관이 “집안의 행복은 가족 건강이 첫째인데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이나 말끔히 병이 나았으니 전도관에 못 가게 하면 되겠습니까! 어머니하고 싶은대로 하게 해주세요.”하고 말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이후 아버지는 더는 전도관에 가는 것을 막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어머니와 저는 물론이고 셋째 언니부터 막내까지 하나님을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