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받으며 일하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깨닫게 돼”

<486회> 박옥주 권사(2)/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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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호에 이어)
송정리에서 듣게 된 신앙촌 소식은 기쁨
광주개관집회(1956. 9. 10~16)에서 은혜를 받고 산후풍으로 인한 고통이 씻은 듯 사라진 어머니(故차말녀 권사)는 저를 데리고 송정리 전도관으로 새벽예배를 매일 다니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전도사님이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셨는데, 하나님께서 경기도 부천에 은혜받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인 “신앙촌”을 건설하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제 옆에 계시던 어머니는 당장이라도 “신앙촌”이라는 곳에 가고 싶어 하셨지만, 그러지 못해 안타까워하셨습니다.
1957년 11월이 될 무렵 소사신앙촌 건설이 시작되고 여러 공장도 지어지면서 다양한 신앙촌 제품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듬해부터 어머니는 메리야스와 캐러멜 등을 하나둘 구입해 사용하시더니 물건이 좋다고 하시며 주변 사람들에게 신앙촌 제품을 드리기도 하고 조금씩 판매도 하셨습니다.
한번은 아침에 물건을 가지고 나가신 어머니가 무척 기뻐하시면서 들어오셨습니다. 교통의 요충지였던 송정리역 근처에는 제법 가게가 많았는데 그날따라 들어가는 가게마다 반겨주셨고 신앙촌 제품을 써 본 분들은 참 좋다고 하며 메리야스, 양말을 내놓기가 무섭게 너도나도 사 갔다고 했습니다. 은혜가 담긴 물건을 가지고 나가서 그런지 온종일 발바닥이 땅에 닿지 않는 것처럼 붕붕 뜨는 듯해 힘이 들기는커녕 기쁜 마음에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의 새로운 시작
1960년 12월 10일. 소사신앙촌으로 이사할 준비를 마치신 어머니는 저희 형제들을 데리고 신앙촌에 가게 되었습니다. 학교와 공장, 각종 상점이 늘어선 소사신앙촌은 깨끗하게 잘 정돈된 도시의 모습이었습니다. 빨간 벽돌로 지어진 양옥 건물의 주택단지는 꽃과 나무들이 어우러져 참 아름다웠습니다. 그리고 소사신앙촌에 송정리 전도관 식구 40세대 정도가 먼저 들어와 있어 서로 반가워하며 이웃사촌으로 즐겁게 지냈습니다.
소사신앙촌에서 활발히 활동하던 소비조합들은 가족의 생계만이 아닌 은혜가 담긴 물건을 전한다는 마음으로 일한다는 것을 알게 된 어머니는 소비조합을 하시게 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신앙촌에서는 주민들 모두가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생활을 했기에 어디를 가도 활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어린 제가 보기에도 그 모습은 참 보기 좋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열다섯 살이 되던 해였습니다. 학생 모임에 참석한 저는 오만제단에서 활동하는 안내부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저도 참여하고 싶은 마음에 자원하여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크고 웅장한 소사 오만제단 건너편 건물에 안내부원을 위한 회의실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그곳에서 계획을 세우고 회의도 진행했습니다. 저는 새벽예배 때 오르막길로 올라오시는 권사님을 도와 드리는 일과 예배실을 청소하는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안내부원들이 쫙 줄지어 서서 넓은 예배실을 쓸어 나갈 때면 힘도 나고 재미있었습니다. 안내부원들의 적극적이고 마음을 다해 일하는 모습을 보며 저도 모든 것에 열심히 하고자 노력하게 되었고, 함께 일하는 법도 배우게 되었습니다.

이슬성신 은혜가 내리는 예배 시간의 소중함
한번은 새벽예배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소사 오만제단 예배실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하나님께서 등단하셔서 힘차게 찬송을 인도해 주셨고 소사신앙촌 주민들도 한마음으로 따라 불렀습니다. 그렇게 찬송을 부르다 고개를 들어보니 하나님이 계시던 단상 왼쪽에 안개같이 뽀얀 이슬성신이 가득 채워져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또 어느 예배 시간에는 사람들 머리 위로 이슬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것을 보고 너무나 신기해 옷을 만져 봤지만, 전혀 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이슬성신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예배 시간이 얼마나 귀한지 그때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에서 일하며 은혜받은 시간 잊지 못해
1962년 덕소신앙촌이 건설되고 수십 개의 공장과 주택 등 여러 시설이 지어지면서 입주자들이 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소비조합을 하시던 어머니는 1967년 1월 즈음에 아파트를 구입해 저희 형제들을 데리고 덕소신앙촌으로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우리나라는 여전히 어려웠던 시절이었기에 아름다운 한강이 보이는 아파트에서 따뜻한 겨울을 보내며 생활할 수 있다는 것은 큰 행복이었습니다. 스물두 살이던 저는 한복부에서 자재 서무로 일했고 셋째 언니는(박순덕 권사/덕소교회) 소사에 이어 덕소에서도 제과부에서 근무하며 사내 배구부 선수로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나머지 동생들도 신앙촌에서 바르고 건강하게 성장해 어머니는 하나님께 항상 감사할 뿐이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한복부에서 일할 때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한복부 공장에 오셔서 직원들에게 안찰해 주셨습니다. 모두 줄지어 앉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제 앞에서 안찰 받던 한 청년을 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배에 손을 살짝 얹으실 뿐이었는데 발버둥을 치며 고통스러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청년의 배에서 주먹만 한 덩어리가 불뚝불뚝 솟아올라 하나님 손을 피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모습은 너무나 놀랍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나도 저렇게 되면 어떡하나?’ 하고 겁이 나서 기도가 절로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찰을 통해 성신을 부어 주실 때 아픔을 느끼는 것은 속에 있던 죄가 성신에 대항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말씀해 주셔서 알고 있었지만 저의 죄가 드러나는 것이 부끄러워 더욱 두려웠던 것입니다. 드디어 제 차례가 되었고 하나님께서 두 손을 제 눈에 대시는 순간 눈이 빠지는 것처럼 아팠습니다. 그다음에는 하나님의 손이 배에 닿자마자 참기 힘든 고통에
‘악’ 하고 소리를 지를 뻔했습니다. 안찰을 받은 후 어느새 아픔은 사라지고 제 몸과 마음에 힘이 솟아나 무엇도 할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께서는 죄가 그대로 드러나게도 하시고 이슬성신 은혜로 그 죄를 씻어주시기도 하신다는 것을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신앙촌은 자유율법을 지키기 위해 세워주신 곳
1970년 기장신앙촌 건설이 시작되고 이듬해 봄인 4월 14일에 저는 동료들과 함께 신앙촌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신앙촌을 건설하신 의미를 다시 한번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자유율법을 지키는 데 있다고 하시며 눈길로도 마음과 생각으로도 죄를 짓지 않아야 함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또 신앙촌은 자유율법을 지키는데 유리한 환경으로 만들어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자유율법을 지켜 죄와는 상관없는 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을 품게 된 저는 ̒어떻게 하면 죄를 멀리하고 맑고 깨끗한 마음이 되도록 생활할 수 있을까?̓ 생각하며 그렇게 살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기장신앙촌에 도착해 타올 공장 원서무로 일하게 된 저는 사무실 업무를 마치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일을 찾아다니며 바쁘게 생활을 하게 되었고, 내 것이 아닌 것을 쓸 때는 더욱 주의하고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로 인해 마음이 상하는 일이 없도록 말과 행동도 조심했습니다. 이렇게 은혜 안에서 일할 때 죄가 무엇인지 깨닫게 해 주셨고 바른 마음으로 행해야 함도 알게 해 주셨기에 그 시간은 저에게 좋은 교훈으로 지금까지 남아있습니다.

신앙촌 소비조합이라는 직분의 귀중함을 깨달아
신앙촌 사원으로 일하던 저도 1980년 4월부터 소비조합을 시작해 신앙촌 제품을 하나라도 쓰는 사람에게는 은혜가 전해진다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판매하고자 했습니다. 그리고 어머니는 기장신앙촌에서도 소비조합으로 활동하시다가 2004년에 은퇴하시고 아름다운 신앙촌에서 편안한 노년을 보내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건강하셨던 어머니가 넘어지시는 바람에 거동하실 수 없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으며 여러 검사를 받던 중 뜻밖에도 대장에 암이 진행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의사선생님께서는 연로하신 상태라 수술을 권하지 않으셨고 어머니도 원하지 않으셔서 사고로 인한 치료만 마치고 신앙촌으로 다시 모시고 오게 되었습니다. 병원에 계시는 내내 신앙촌에 가고 싶다고 하셨기에 너무나 편안해 하시며 좋아하셨습니다.

2011년 8월 4일 90세의 연세로 어머니는 큰 고통 없이 돌아가시게 되었습니다. 귀한 생명물로 씻겨드리고 아름답게 피어나신 어머니 모습을 저희 형제들 모두 참석해서 보았습니다. 고령에 병환으로 누워계시면서 점점 여위어 가시고 어두워졌던 피부가 생명물로 씻겨드리자 병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환하게 피어났고 주무시듯 편안한 얼굴이 되셨습니다. 맨 앞자리에서 어머니를 보게 된 남동생과 형부는 뻣뻣하게 굳어있어야 할 팔의 뼈마디가 노근노근해진 것을 보고 놀라워하기도 했습니다. 귀한 생명물의 권능을 허락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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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회에서 은혜를 받고 간질병이 낫게 된 제가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을 깨닫게 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많은 시간이 지나왔습니다. 돌이켜보면 언제나 받을 줄만 알았지 간직하지 못해 죄송한 마음뿐입니다. 이런 무지몽매한 저에게 자유율법을 알려주시고 일 속에서 마음의 법을 지키며 살아가야 함을 깨우쳐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리는 마음입니다.
“성도들아 곧 깨어서 열심을 내어라”라는 찬송가 가사처럼 앞으로도 노력하며 살아가겠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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