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조합으로 2남 2녀를 모두 대학교육까지 시키고
최종성 승사(2) / 소사신앙촌<이어서>평창제단에 다니던 교인 중에는 폐병을 앓는 젊은 여자 분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분이 숨을 거두었다는 연락이 와서 저를 비롯해 평창제단 교인들이 그 집에 가 보았습니다. 고인의 시부모님은 폐병이 옮을까 봐 무서워하며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가지도 않으려고 했습니다. 여남은 명의 우리 교인들이 천을 끊어 와서 수의를 만들고 시신의 얼굴과 몸을 깨끗이 닦아 주었습니다. 축복 캐러멜을 물에 넣고 끓인 후 그것으로 시신의 얼굴을 닦아 주었더니, 폐병을 앓아 비쩍 말랐던 얼굴에 살이 오르면서 뽀얗고 곱게 피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이 노긋노긋 부드러워 편안히 잠을 자고 있는 듯한 시신에 수의를 입히고 반듯이 눕혀 놓았습니다. 그 일을 모두 끝내고 보니 식사 때가 훌쩍 지나 우리 교인들은 각자 집에 가서 밥을 먹고 다시 모이기로 했습니다.
몇 시간 후 그 집에 가서 시신을 보았더니 시신이 나무 막대기보다 더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고인의 시부모님을 불렀더니, 바깥에 나갔다 들어온 남편이 시신을 붙들고 한참을 울었다고 했습니다. 아내를 잃어 슬픈 마음이야 이해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예뻤던 시신이 흉하게 된 것을 보니 너무나 속이 상했습니다. 우리 교인들이 계속 찬송을 부르니 몸이 점점 노긋노긋해졌는데, 처음처럼 예쁘지 않은 채로 입관하게 되어 안타까웠습니다.
그즈음 저희 고모님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나시게 되었습니다. 저는 고모님 집에 가서 큰 냄비에다 물과 축복 캐러멜을 끓인 후 고모님 입에 넣어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한 대접을 다 넣도록 한 방울도 흘러나오는 것 없이 넘어가는 것이었습니다. 시신의 입에 보통 물을 넣으면 전혀 들어가지 않고 다 흘러나오는데 너무나 신기했습니다. 고모님은 돌아가시기 얼마 전부터 거동을 못하셔서 계속 누워 계셨기 때문에 등과 엉덩이에 욕창이 나 짓물러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신을 깨끗이 씻긴 후 캐러멜 끓인 물로 욕창 난 부위를 닦아 드렸더니 짓물렀던 곳이 싹 아무는 것이었습니다. 온몸이 노글노글 부드럽게 되고 얼굴은 아주 뽀얗게 피어 너무나 예뻤습니다. 그 모습을 본 고모의 큰아들은 놀라움을 감추지 못하며 진심으로 고마워했고 그 후로 평창제단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습니다.
1958년 여름 저희 가족은 소사신앙촌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촌은 한마음으로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같은 공장에서 열심히 일해 좋은 제품을 만들고, 맑게 자라는 아이들이 같은 학교에서 사이좋게 공부하는 곳이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들어갈 것을 간절히 바랐던 저는 그곳에서 생활하는 것이 너무나 감사하고 기뻤습니다.
소사신앙촌의 노구산에 오만제단이 지어지는 동안 작은 제단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그곳에서 예배드릴 때 있었던 일입니다. 단에서 설교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니 하나님 머리 위에 환하고 동그란 빛이 둘러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형광등 빛도 아니고 햇빛과도 다른 빛으로 무어라 설명하기 어렵지만 너무나 아름다웠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며 이쪽저쪽으로 왔다 갔다 하시면 그 빛도 따라서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전에 하나님께 영광이 둘린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제 눈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1958년 겨울, 평창에 볼일이 생겨 잠시 내려가게 되었는데 때마침 하나님께서 평창제단에 오신다고 했습니다. 저도 평창제단 교인들과 함께 제단 이곳저곳을 정성껏 단장하며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오시던 날은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습니다. 눈 쌓인 고갯길을 넘고 넘어 평창제단에 오신 하나님께서는 교인들 한 명 한 명에게 안수를 해 주셨습니다. 그때 하나님을 모시고 예배드리는 시간이 얼마나 기쁘고 즐거웠는지 모릅니다. 강원도 깊은 산골에 자그마하게 세워진 제단이지만 하나님을 모신 곳이 바로 천국임을 그때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이듬해 저는 소비조합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강원도에서만 살아 서울 지리를 몰랐던 저는 지리를 잘 아는 박 권사님과 함께 카스텔라를 가지고 남대문시장으로 갔습니다. 당시 신앙촌 카스텔라는 맛이 좋아 최고 인기였는데, 장사 나간 첫날 남대문시장에 자리를 잡고 카스텔라 수십 개를 적당히 잘라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맛을 보게 했습니다. 먹어 본 사람들은 너무 맛있다며 내일 꼭 갖다 달라고 너도 나도 주문을 했습니다. 그다음 날 가지고 간 카스텔라도 순식간에 다 팔리고 카스텔라를 찾는 사람들이 자꾸 늘어났습니다. 난생처음 해 보는 장사였지만 무척 재미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종종 소비조합들을 부르셔서 말씀을 해 주셨는데, 언제나 정직하게 사람들을 대할 것을 강조하셨고 예의 바르게 행동하며 고객들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마음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렇게 받은 교육대로 고객들을 대하면 어딜 가나 따뜻한 환대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를 친어머니처럼 생각하며 믿고 의지하는 고객들을 볼 때마다 저는 하나님께 참 바른 교육을 받았다고 생각하곤 했습니다.
카스텔라 판매를 시작으로 고객이 점점 늘어나면서 저는 신앙촌에서 생산하는 여러 가지 제품을 팔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소비조합을 하며 저희 가족의 생계를 꾸려 갔습니다. 고향 평창에 있는 큰댁에서는 아들 한 명을 공부시킬 때 논도 팔고 소도 팔아 어렵게 학비를 마련하는 것을 보았는데, 저는 소비조합을 해서 2남 2녀 아이들을 모두 대학까지 교육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아이들에게, 내가 신앙촌 소비조합을 하기 때문에 너희들을 이만큼 키울 수 있는 거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지금 다들 넉넉한 삶을 누리는 아이들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늘 감사드립니다.
올해 여든한 살인 저는 하루 중에 새벽예배 시간이 가장 기다려집니다. 하나님 말씀을 듣고 마음을 모아 찬송을 부르는 그 시간에 세상 무엇도 부러울 것 없이 마음이 참 평안해지는 것을 느낍니다. 하나님 뜻대로 아름다운 마음과 생각을 가지며 죄와는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 구원의 소망을 꼭 이루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