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발령지에서 첫 기도, ‘하나님 기뻐하시는 바를 알게 하소서’

조남일 관장(3) / 진주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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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조남일 관장이 시무할 당시 춘천 효자동 제단 교인들 모습

산언덕에 위치한 원산전도관은 초가집 시골 제단이었습니다. 제단에 도착하자마자 저는 예배실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드렸습니다. 이 미련한 자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바가 무엇인지 알게 해 달라고 간구하는 것이 첫날의 기도였습니다. 당시 원산전도관은 기존에 있던 교인들이 신앙촌에 입주하거나 교역자로 나가게 되어 새롭게 전도를 시작해야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교인도 없는 낯선 곳에서 전도를 하는 것이 막막하게 느껴졌으나 어려움을 극복하고 결실을 맺는 자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 생각하며 어떻게 해야 될지 궁리하고 고민했습니다.

첫 교역 발령 받은 원산전도관에서
마치 누가 이끌어 데려온 것 같이
찬송소리 듣고 학생들이 교회에 찾아와
저는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부자된 듯

그렇게 며칠이 지나 토요일이 되었을 때였습니다. 주일학생들을 제단에 모아 놓고 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중학생 여러 명이 예배실로 들어왔습니다. 그 학생들은 찬송 소리를 듣고 왔다면서 “우리도 여기에 다녀도 돼요?”라고 했습니다. 마치 누가 학생들을 이끌어 제단까지 데리고 온 것만 같았습니다. 그 아이들이 매주 일요일마다 제단에 나오기 시작하니 저는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부자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하나님 말씀과 성경 구절을 설명하며 ‘이슬 같은 은혜를 주시는 분이 곧 성경에 기록된 감람나무’이심을 가르치면 두 눈을 빛내며 열심히 귀를 기울였습니다. 학생들이 말씀을 깨닫고 전도하는 기쁨을 알게 되면서 친구들과 동생들을 전도했으며 제단에는 항상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그치지 않았습니다.

장례예배에서 뻣뻣하게 굳은 시신이 생명물로 노긋노긋해지고
뽀얗게 피어 나는 권능을 본 후 유족들이 놀라워 하고
기성교인들도 태도가 호의적으로 변해 전도관 비방 사라져

원산에서 3개월 동안 지낸 후에는 한산제단과 겸무하라는 발령을 받았습니다. 저는 한산에서 지내면서 일주일에 두 번씩 원산에 갔는데 버스도 다니지 않던 시절이라 산 고개를 넘어서 걸어 다녀야 했습니다. 저녁예배를 인도하기 위해 어두운 산길을 헤치며 가다 보면 호랑이가 나온다는 이야기도 떠오르고 무서운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단이 가까워져서 교인들의 우렁찬 찬송 소리가 들리면 두려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습니다. 원산에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올 때는 학생들이 산 입구에까지 몰려나와서 제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크게 찬송가를 불러 주곤 했습니다. 원산제단에는 학생들뿐 아니라 어른들도 점점 늘어나게 되었으며, 교인들이 힘을 합하여 초가집 제단을 허물고 그 자리에 시멘트 블록으로 아담한 제단 건물을 지었습니다.

한산제단 인근에는 큰 장로교회가 있어서 동네 사람들 대부분이 그 교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한산제단에 2, 30명의 교인이 있었는데 장로교회의 세력이 큰 동네라 그런지 같이 전도하고 심방하러 가자고 하면 선뜻 나서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중에서 인맥이 넓은 교인 한 명이 같이 가겠다고 하여 저는 그분이 아는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중에 ‘전도관에서 주는 생수는 손 씻은 물, 발 씻은 물’이라며 터무니없는 비방을 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저는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라고 했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손 씻은 물을 줘도 더럽다고 먹지 않는 것이 상식입니다. 장성한 어른이 그런 것을 먹는다고 하는 것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상식 이하의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낼 뿐입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동네 사람들이 생명물의 권능을 알게 되는 일이 있었습니다.

춘천 효자동으로 제단 개척 하라 발령
감람나무 하나님과 은혜 체험을 전하자
갈수록 교인 늘어 전도 목표를 정하고
선의의 경쟁 펼치며 신나게 전도해

한산제단에 다니는 이 집사님의 시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전도관식으로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시신은 한눈에 보기에도 뻣뻣하게 굳어 있었는데 생명물로 깨끗이 닦은 후에는 온몸이 노긋노긋해지고 얼굴도 맑고 뽀얗게 핀 것을 확연히 알 수 있었습니다. 살아 계신 것처럼 편안한 모습을 보고 유족들도 놀라워했습니다. 그렇게 장례예배를 마친 후 장로교회가 있는 동네로 전도를 하러 갔더니 사람들의 반응이 무척 호의적으로 변한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고인의 따님 되시는 분이 그 장로교회에 열심히 다녔는데 그분이 장례예배에서 있었던 일을 교회에 가서 이야기했던 것이었습니다. 전도관의 생수로 시신을 닦아 주니 산 사람같이 편안하게 되더라는 이야기를 들은 뒤로 사람들은 전도관이 어떤 곳인지 알아보자며 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특히 그 교회의 부인회장이 이야기를 잘 받아들여서 자주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하나님께서 군산에서 집회를 하셨을 때는 그분이 참석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장례예배를 계기로 터무니없는 비방이 사라지면서 전도가 더욱 활발해졌습니다.

그 후 1968년에는 춘천 효자동에 제단을 개척하라는 발령을 받았습니다. 먼저 주택 한 채를 구입하여 예배드릴 공간을 마련하고 예전에 제단에 다녔던 분을 알게 되어 그분과 함께 전도를 했습니다. 당시는 시골의 인심이 좋은 데다 지금과 달리 처음 보는 사람과도 대화를 잘 나누던 시절이어서 이야기를 하며 전도하기가 수월했습니다. 성경을 아는 사람을 만났을 때는 성경에 관해 질문을 던졌는데 감람나무가 어떤 존재인지 물어보면 제대로 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때 감람나무에 대해 차근차근 설명하며 제가 체험한 은혜에 대해서도 이야기하면 관심을 보이며 더 알고 싶어 했습니다. 날이 갈수록 제단에 모이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새벽예배에 나오는 교인이 7, 80명 정도 되었습니다. 그때 교인들이 사는 지역별로 일곱 개 구역을 나누어 각 구역마다 전도의 목표를 정했더니 교인들끼리 서로 선의의 경쟁을 하며 신나게 전도를 했습니다. 학생들도 많이 전도되어 제단 건물을 신축할 때 건설 현장에 나와서 일을 돕기도 했습니다.

(조남일 관장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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