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발명
미국의 과학자 마이클 셔머는 최근 저서 “천국의 발명”에서 다양한 질문을 던진다. 천국이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그의 대답은 명료하다. 천국은 과학적으로 증명할 수 없는 허구이자 인간의 발명품이라는 것이다.
일례로, 사막의 유목민이 만들어 낸 천국은 시원한 샘물이 흐르고, 북극의 에스키모가 생각하는 천국은 물개가 널려 있다는 식이다. 천국은 절대적인 신의 세계가 아니라 인간의 욕망이 빚은 판타지에 불과하다고 한다.
또한 마이클 셔머는 ‘기독교의 천국은 칭송과 경배만 끝없이 이어지는, 도망칠 수 없는 하늘나라의 북한’이라고 일갈한다. 이처럼 과학자의 조롱을 받는 천국이지만 한때 천국의 열쇠를 쥐고 있다며 권세를 휘두른 집단이 있었다.
1095년 교황 우르바누스 2세는 천국의 열쇠를 극적으로 활용했다. “예수를 위해 싸우다 죽으면 천국을 보상받을 것이다!”라는 그의 외침은 십자군 결성에 결정적인 동기를 부여했다.
잔혹하기로 악명 높았던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탈환할 때 유대인과 무슬림을 무차별 학살했다. 십자군은 발목까지 차오른 핏물을 헤치며 신에게 기쁨의 경배를 올렸다. 이 전쟁으로 모든 죄를 사함 받고 천국을 보장받았기 때문이었다. 십자군은 예루살렘에서 천국으로 단체 승천할 것을 기대했다고 한다.
십자군이 한시적인 천국행 티켓이었다면 예수 제자 시절부터 계속된 천국행 티켓은 ‘순교’였다. 가톨릭에서는 신앙의 박해를 물리치고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즉시 천국에 간다고 한다.
가톨릭은 신자들의 신앙심을 키우는 수단으로 순교 전설을 적극 활용했다. 미사 때 순교자들의 고통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낭독했고 신도들 사이에서 널리 읽혔다. 순교의 고통을 세밀하게 묘사하면서 피비린내 나는 고통을 당하면 당할수록 천국이 가까워진다는 환상을 불러일으켰다. 신학자이자 철학자인 가브리엘레 조르고는 ‘순교 전설은 순교자의 감정에 이입되는 사이코드라마(역할극)’라고 했다.
순교 전설을 반복해 들으며 순교는 신도들 머릿속에 뿌리내렸고 기꺼이 생명을 버리게 만들었다. 죽음은 곧 천국행이었으므로 그들은 죽음의 고통을 갈망했다. 신앙심이 깊은 어머니는 자식의 순교를 기쁘게 받아들였고, 순교자는 참수의 순간 황홀경에 빠진 표정을 지었다.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은 후에도 영혼은 영원한 복을 누린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프란치스코가 엉뚱한 이야기를 했다.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영혼은 소멸되고 사라질 뿐”이라고 했던 것이다. 천국의 열쇠를 쥐고 영혼을 치리한다는 종교에서 난데없이 영혼 소멸 운운하니 비판이 쏟아졌고, 교황은 기자의 실수라며 얼버무렸다.
그러나 교황을 비판할 일도 아니다. 원래 예수가 이 세상에서 생명을 잃으면 끝(마태16:26, 마가8:36)이라며 내세와 영혼을 부정했던 것이다. 예수의 실체가 이러하니 예수에게 헌신한 테레사 수녀가 천국과 영혼을 느낄 수 없다고 절규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을 것이다. 테레사 수녀는 천국의 존재를 따져 묻지 못했지만 이제 시대는 맹목적인 믿음을 거부하고 천국의 과학적인 증명을 요구하고 있다. 코너에 몰린 교황은 증명할 자신이 없다는 것을 이제야 커밍아웃한 것인지도 모른다.
가톨릭의 상징물은 사형 형틀과 벌거벗은 시체다. 죽음을 교사(敎唆)해 온 역사적 사실을 한눈에 보여 주니 이보다 명쾌한 상징이 없다. 그 실체를 세상이 지금 알아본다면 그것은 만시지탄일까, 천만다행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