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은 닫혔는데 시원한 성신의 바람이 불어와

오향근 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2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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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남편은 제가 덕소신앙촌에 가다가 쓰러진 게 아닌가 하며 걱정했는데 이렇게 다 나았느냐면서 무척 놀라워했습니다. 그 전까지 남편은 전도관에 다니는 것을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제 병이 깨끗이 나은 후로는 완전히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저는 안수를 받고 돌아온 그날부터 ‘매향리에도 전도관을 세웠으면…….’ 하고 간절히 원하게 되었습니다. 제 생각을 발안제단 전도사님께 말씀드렸더니, 얼마 후 매향리에 전도사님을 보내 주셔서 부지를 마련하고 흙벽돌을 찍어 전도관을 짓게 되었습니다. 당시 시아주버니의 딸이 제단 일을 도왔는데, 일을 하면서 그 조카딸의 얼굴이 뽀얗고 곱게 피는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열일곱 살이라 한창 고울 때이긴 하지만 동네 사람들도 놀랄 정도로 정말 꽃송이처럼 예뻐지는 조카딸을 보면서 ‘저 애가 은혜를 받았나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저희 남편 또한 성심껏 건설 일을 도왔으며 얼마 후에는 조카딸과 남편이 함께 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때 저는 7년 전에 꾸었던 꿈을 떠올리면서 ‘시집에서 전도관에 나올 사람이 두 사람 있다고 하셨지. 바로 이 사람들을 말씀하신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향 매향리에 전도관을 지은 후
성심껏 돕던 남편과 조카딸이
함께 제단에 출석, ‘시집에서
두 사람이 나올거라’는 꿈대로 돼

1964년 매향제단이 세워진 후 저는 전도사님과 함께 여러 동네를 다니며 전도를 했습니다. 전도사님께서는 ‘감람나무’와 ‘이슬같이 내리는 은혜’ 등 전도관의 교리를 쉽게 풀어서 이야기해 주셨고, 저는 은혜 받은 체험담을 사람들에게 들려주었습니다. 안수를 받고 제 병이 말끔히 나은 일을 이야기하면 사람들은 신기하게 생각하며 전도관에 대해 관심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매일매일 바쁘게 전도를 다니는 동안 마음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고, 길거리에 지나가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에는 은혜를 모르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는 생각에 더욱 바쁘게 다니며 이 진리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제단 지을 자금을 고민하다가 배추농사가 수익이 높다는 말을 듣고
경험은 없었으나 정성껏 심고 가꾸니 상인들이 와서 “배추가 얼마나
좋은지 꽃으로 보인다”며 서로 높은 값을 불러 큰 도움을 얻어

그렇게 매향제단에 다니던 1968년이었습니다. 저희 막내아들 종형이는 태어날 때부터 허약하여 항상 걱정을 했는데, 세 살이 되면서 더욱 바짝 마르고 기운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외출했다가 돌아와서 아이를 안았더니 스르르 잠드는 것처럼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계속 앓기만 하다가 눈을 감는 것을 보았을 때 저는 마음이 몹시 아프고 안타까웠습니다.

저는 입관예배를 드리기 위해 매향제단 전도사님께 말씀드리고 옥양목을 끊어 와서 아이에게 입힐 수의를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옆에서 바느질할 때 시신 주위에 시원한 바람이 감돌면서 바느질하고 있는 천이 바람에 날리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창문도 안 열렸는데 어디서 바람이 들어오지?’ 하던 저는 그 전에 성신의 바람에 대해서 들었던 것이 떠올라 ‘아!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입관예배를 드릴 때는 매향제단 전도사님이 찬송을 부르시고 사모님과 제가 아이를 씻겼습니다. 축복 비누로 씻기고 나자 피부색이 아주 맑고 뽀얗게 피어나면서 입술이 빨갛게 물들어 얼마나 예쁜지 몰랐습니다. 생전에 병약했던 아들은 보통 아이들과 달리 피부색이 누르스름하고 비쩍 말라서 보기에 안쓰러웠는데, 얼굴에 포동포동 살이 오르며 너무나 예쁘게 핀 모습으로 입관을 했습니다.

세상에 은혜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 위해 매일 매일 이곳 저곳을 다니며
‘감람나무’와 ‘이슬성신’을 전도하니
마음이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어

그렇게 장례식을 모두 마치고 3일이 지난 후였습니다. 그날 비가 내려서 논밭에 나가지 못하고 집에 있는데,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바라보니 저도 모르게 서글퍼지며 아들 생각에 마음이 아파 왔습니다. 눈물을 흘리다 깜빡 잠이 든 저는 꿈속에서 아들아이를 보게 되었습니다. 새하얀 옷을 입은 아이는 방긋방긋 웃으면서 재미있게 놀더니 저를 보고는 “엄마 걱정하지 마.”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을 꾸고 난 뒤로 마치 슬픔을 전부 거두어 간 것처럼 마음이 참으로 잔잔하고 평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매향제단이 세워진 후로 저는 농사를 짓는 틈틈이 신앙촌 제품을 판매하였습니다. 당시 덕소신앙촌에서 다양한 제품이 생산되었는데 시골의 집집마다 다니며 품질 좋은 신앙촌 제품을 전하는 일이 그렇게 신나고 재미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장사를 하면서 여러 동네를 다니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매향리는 버스도 안 다니는 시골인데, 여기보다 더 크고 교통이 편리한 곳에 제단이 있으면 전도가 더 잘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전도사님께 말씀드리고 교인들과 같이 상의했는데, 그러던 어느 날 김은안 씨(현재 서울 노량진교회 권사)라는 젊은 여자 분이 매향리제단을 찾아왔습니다.

축복 비누로 아이의 시신을 씻기자
피부색은 맑고 뽀얗게 화하고
입술은 빨갛게 물들면서
너무나 예쁜 모습으로 피어나

서울에 사는 그분은 조암리의 친정집에 다니러 왔다고 하면서, 몇 년 전부터 서울에서 전도관에 나간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분은 “제가 은혜를 받고 보니 친정부모님을 꼭 전도하고 싶었어요. 그런데 조암리에 전도관이 없어서 친정집 가까이에 전도관을 세우면 좋겠다 생각하고 내려왔지요. 여기 와서 매향리에 전도관이 있다는 말을 듣고 상의하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라고 했습니다. 매향리에서 20리 정도 떨어진 조암리는 매향리보다 훨씬 크고 교통도 편리한 동네였습니다. 저희는 그렇잖아도 조암리 같은 곳에 전도관을 세우려고 계획하던 중이라 그 이야기가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웠으며, 그분도 제단을 짓는 데 적극 협조하겠다고 했습니다.

저는 번화한 곳에 제단을 지으면 좋겠다고 상의할 때부터 제단을 짓는 데 보탬이 되어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을지 고민하던 중에 배추 농사가 다른 농작물보다 수익이 높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때까지 배추 농사를 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 밭에다 배추를 심어야겠다.’ 하고 생각하고 처음으로 배추를 심어서 정성껏 가꾸었습니다. 가을이 되자 다른 농가보다 훨씬 크고 튼실한 배추를 수확하게 되었으며, 상인들이 “배추가 얼마나 좋은지 꽃으로 보인다.”라면서 저희 집 배추를 사려고 서로 높은 값을 부를 정도였습니다. 그렇게 배추를 수확하여 제단을 짓는 데 나름대로 도움이 될 수 있었습니다.

조암제단을 지을 때 고용했던 인부가
“전날 밤 하늘에서 제단 짓는 곳까지
불기둥이 환하게 비추어 놀랐다”고 해
제단 짓는 곳에 은혜주심을 알고 감사

조암제단을 지을 때 인부들을 고용해 일을 했는데, 어느 날 한 인부가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전날 밤에 하늘에서 제단 짓는 곳까지 불기둥이 환하게 내리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하나님께서 제단 짓는 곳에 은혜를 주시는구나!’ 하면서 마음속으로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 그분이 이야기하기를 “참 이상해요. 내가 술하고 담배를 무척 좋아하는데 전도관 일을 하고부터는 이상하게 술을 마시면 어지럽고 담배를 피우면 목이 아파요.” 하며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결국 그분은 전도관을 짓는 동안 술과 담배를 전혀 하지 않고 딱 끊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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