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를 가지고는 천국 가지 못한다’는 말씀이 마음에 울려

정국모 전직 관장(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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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희 어머니는 그 전까지 거성 장로교회에 열심히 다니셨는데, 거성 교회에 발길을 끊고 전도관으로 나가게 되자 목사가 몇 번이나 찾아와서 “어떻게 하다 이단에 현혹되었습니까?” 하며 장로교회로 돌아오기를 종용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는 “저는 이제 전도관 사람입니다. 받은 바 은혜가 확실한데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앞으로는 은혜 받은 곳으로 가겠습니다.” 하며 단호하게 거절하셨습니다. 그 후로 몇 번 더 찾아와서 이단 운운하며 전도관을 비방하던 목사는 어머니의 확고한 뜻을 알고는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눈과 배에 살짝 손을
대실 뿐인데 너무 고통스러워
처음 일주일은 손도 못댈 정도로 아파
안찰 계속 받으며 고통이 점점 덜해져

당시 대신동에 살았던 저의 누님도 전도관 개관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은 뒤로 전도관에 열심히 다녔습니다. 어느 날인가 누님 댁에 갔을 때 누님이 네 살 난 막내아들을 안고서 찬송을 부르며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을 머리에 발라 주고 있었습니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곁에 다가가 보니 조카 머리에 종기가 생겨서 피고름이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힘없이 누워서 앓고 있는 아이를 보니 마음이 아팠습니다. 걱정이 된 저는 다음 날 누님 집에 가서 조카를 봤는데, 머리 위에 피고름이 엉겨 있던 종기가 정말 씻은 듯이 나아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럴 수가!” 하며 저도 모르게 감탄이 나왔습니다. 그때 생명물의 귀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부산전도관에 다니던 어느 날 저는 처음으로 하나님께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서 한 사람씩 차례대로 안찰을 받았는데,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마다 “혈기가 있구나.” “고집이 있구나.” 하며 지적을 하기도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눈과 배에 살짝 손을 대실 뿐이었지만 어떤 사람은 아프다고 고함을 치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팔다리를 버둥거려서 옆에서 붙잡아 주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저의 죄를 사해 주시옵소서.’ 하며 차례를 기다렸습니다. 제가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자마자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참다못해 큰 소리로 고함을 치고 말았습니다. 처음 안찰을 받고 일주일 동안 배가 너무 아파서 손을 댈 수가 없었는데, 그 후로는 안찰을 받을 때마다 그 고통이 점점 덜해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안찰을 받을 때 하나님께서 “이제 돼지 멱따는 소리가 안 나는구나.” 하시며 웃으시는 것을 뵙고 ‘그 많은 사람을 안찰하시는데 어떻게 나를 기억하시나?’ 하며 놀라기도 했습니다.

영월에 개척 전도사로 발령받아 읍내로 제단을 이전 하려는데
관은 허가를 안 내주고 담당자는 피하기만, 근처 천주교회는 반대, 주민들은 반대 연서
하나님께 축복 받으며 보고 드리자 “가라, 이제 되었다” 순간 용기 솟아

안찰을 받은 후로 저는 저 자신이 죄인임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어찌 이런 죄를 짓고 살아왔는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너무나 많은 죄를 지었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죄를 가지고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 성신으로 죄를 씻음 받아야 한다.”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계속 제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때 저는 ‘이 진리를 전하는 교역자가 된다면 죄를 사함 받는 데 더욱 유익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저 자신은 한없이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꿋꿋하게 나아가겠다는 각오로 교역자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1962년 강원도 영월의 개척 전도사로 발령받았을 때 하나님께서 안찰을 해 주시며 “영월에 가서 열심히 해!” 하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저는 영월에 흐르는 동강에 나가서 찬송을 부르며 교역자의 꿈과 목표를 차근차근 세워 나갔습니다. 당시 영월은 아직 제단을 마련하지 못하여 한 가정집에서 예배를 드리는 형편이라 무엇보다도 제단을 짓는 것이 급선무였습니다. 얼마 후 하나님께서 보조금을 하사해 주셔서 제단 건축을 시작하게 되었는데, 난생처음 제 손으로 성전을 짓는다고 생각하니 기대와 걱정으로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잘 짓고 잘 짓세. 우리 집 잘 짓세. 만세 반석 위에다 우리 집 잘 짓세.” 하는 찬송을 부르며 청년들과 함께 한 장 한 장 흙벽돌을 찍어 나갔습니다. 얼마 후 장마철이 시작되면서 쏟아지는 비 때문에 흙벽돌이 부서지기가 일쑤였고, 하루빨리 장마가 지나가기를 바랐지만 그해의 장마는 유달리 길게만 느껴졌습니다. 흙벽돌 5,000장을 다 찍은 후 돌로 기초 공사를 하고 흙벽돌이 차근차근 올라갈 때의 기쁨은 세상을 얻은 것보다 더 큰 기쁨이었습니다. 지붕 높이까지 흙벽돌을 쌓았을 때 밤새도록 비가 내리는 바람에 흙벽돌이 와르르 무너져 버린 일도 있었으나, 다행히 대부분의 벽돌을 재사용 할 수 있어서 다시금 벽돌을 쌓아 올리고 함석지붕을 씌워 제단이 완성되었습니다. 영월에 진리의 꽃을 피울 화원이 마련되었다는 생각에 한없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영월제단을 건축한 지 1년쯤 지났을 때 저는 제단을 이전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영월제단이 주택지와 멀었기 때문에 전도를 위해서는 읍내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영흥리에 부지를 마련하고 건축 허가를 영월군청에 신청하였으나 신청에 아무런 하자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찌 된 일인지 허가가 나오지 않았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제단 부지 근처의 천주교회에서 전도관 건축을 반대하고 나섰으며, 그 동네에 사는 신문사 기자는 주민들의 연서를 받아 전도관 건축을 반대하는 진정서까지 제출하였습니다. 그들은 전도관이 번화한 읍내에 세워지는 것을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하는 것 같았습니다.

안찰 받은 후 죄인임을 깊이 깨달아
‘성신으로 죄를 씻음 받아야 한다’는
하나님 말씀이 계속 마음을 울려
이 진리 전하는 교역자 될 것을 결심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건축 허가를 받아야 된다는 생각에 건설과장을 만나기 위해 갖은 애를 써 보았지만 이리저리 피하기만 할 뿐 상대를 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건설과장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간곡히 부탁해 보았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다 해 봐도 해결되지 않고 이 문제로 인해 3개월 동안 고심을 하면서 그 괴로움은 말로 다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축복일이 다가와 하나님을 뵈어야 할 것을 생각하니 너무나 걱정되고 송구스러웠습니다. 덕소신앙촌에 도착하여 축복일예배를 드리기 전에 하나님께 눈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었을 때 울면서 “영월에서 제단을 읍내 주택가로 이전하려고 하는데 뜻대로 안 됩니다. 군청의 건설과장은 상면조차 안 합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그래.” 하시고는 잠시 후 “가라, 이제 되었다.”라고 하셨습니다. 그 순간 제 마음에 힘과 용기가 솟아올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인사를 드렸습니다. 축복일예배를 드린 후 다음 날 영월에 돌아왔더니 영월군청으로 나오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군청에 갔더니 그렇게 만나기 힘들었던 건설과장이 저를 보고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그동안 수고했죠.” 하는 것이었습니다. 건축 허가가 나왔다는 말에 감격과 감사함을 억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제단 건축을 서두르겠습니다.’ 하며 용기백배하여 제단 건축에 박차를 가했습니다. 제단을 반대하던 신문사 기자가 험상궂은 청년들을 동원하여 건축을 방해하려는 일도 있었으나, 당당한 태도로 일을 계속하니 결국 그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제단은 순조롭게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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