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앞에는 추하디추한 죄인임을 깨닫고
정순례 권사(1) / 부천교회올해 희수(稀壽, 70세)를 맞는 저는 이십대 젊은 시절부터 이 길을 따라왔습니다. 그동안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되새기면서,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저의 은혜 체험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결혼 후 서울 영등포에서 살던 때로 1955년 이른 봄날이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모여서 떠들썩하게 이야기하는데, 저희 동네와 가까운 도림동 장로교회에 ‘불의 사자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오신다고 했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여서 “박 장로님이 뭐하시는 분인데요?” 하고 물어 보니, 박 장로님은 집회를 하시면서 불치병자의 병도 낫게 하시고 은혜를 많이 내리시는 분으로, 요즘 그분 때문에 온 장안이 들썩인다는 것이었습니다. 도림동교회에 다니는 한 이웃은, 지금 교회를 새로 짓다가 자금이 부족하지만 박 장로님이 집회를 하시면 사람들이 엄청나게 모이기 때문에 교회를 완성할 수 있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처음 들었던 저는 무척이나 새롭고 놀라웠습니다. 부흥집회는 어떻게 하는 것인지, 박 장로님은 어떤 분이기에 저렇게 유명하신지 궁금증을 참을 수 없어서 난생처음으로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집회가 열리는 날 도림동교회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등단하신 박태선 장로님은 하얀 와이셔츠를 입으시고 얼굴이 환하셨는데, 제 느낌으로 아주 훌륭하고 좋으신 분인 것 같았습니다. 박 장로님의 인도에 따라 모두들 힘차게 찬송을 부를 때 저는 찬송가를 몰라 가만히 앉아 이 사람 저 사람 찬송 부르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그러는 동안 무슨 좋은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공연히 웃음이 나올 정도로 마음이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가까운 곳에 집이 있는데도 집에 갈 생각이 나지 않고 배고픈 줄도 몰랐습니다.
그렇게 집회 3일째 되던 날, 예배 시간에 갑자기 예전에 잘못했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마치 누가 귀에다 대고 하나하나 일러 주는 것처럼 그렇게 생생하게 기억날 수가 없었습니다. 고향인 충남 천안에는 밤나무와 대추나무가 많아 어릴 적에 친구들과 함께 밤과 대추를 따다 먹곤 했는데, 내 것이 아닌 남의 열매를 좋아라 하며 먹었던 일이 너무나 더럽게 느껴졌습니다. 어떻게 하면 용서받을 수 있을지 안타깝고 후회되는 마음에, 하나님께 간절히 용서를 구하며 기도드렸습니다. 스물한 살이던 그때까지 어른들 말씀에 순종하며 나쁜 일 안 하고 살았다고 생각했었지만, 하나님 앞에는 추하디추한 죄인임을 알게 되었고 그토록 진심으로 눈물 흘리며 용서를 구하는 것도 처음이었습니다.
도림동교회 집회가 끝나고 얼마 후에는 영등포 모래사장에서 하나님 집회가 열렸습니다. 그곳에 참석해 보니 드넓게 천막을 치고 가마니를 깐 곳에 벙어리, 장님, 꼽추 등 불치병 환자들이 수없이 모여 있었습니다. 제 오른쪽에도 앞을 못 보는 여자가 있었으며, 왼쪽에는 듣지도 못하고 말도 못 하는 벙어리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일어나 뛰라고 할 때 병이 나은 사람들은 다 일어나세요.”라고 하셨습니다. 한참 예배를 드리던 중 “일어나 뛰라!”고 외치시자 정말 여기저기서 많은 사람들이 일어났습니다. 제 옆의 벙어리 아가씨도 일어나서 “아, 아-” 하며 소리를 내더니 “어, 엄- 마-” 하며 떠듬떠듬 말을 하고, 장님 여자는 “보여요, 눈이 보여요!” 하며 소리쳤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그 기적을 똑똑히 목격한 사람들이 모두들 환호하며 기뻐하는 가운데 하나님께서 두 사람을 단상으로 부르셔서 소감을 말하게 하셨습니다. 벙어리였던 여자는 “하-나-님, 마라게 해 주서서 감사함다.” 하며 어눌한 말로 감격에 차서 이야기했고, 눈을 뜨게 된 아가씨는 너무나 감사하다며 앞으로 하나님을 잘 믿겠노라고 했습니다.
영등포 집회가 끝난 후에도 하나님의 집회는 계속되었습니다. 용산 군인교회 집회, 한강 모래사장 집회, 인천 집회, 서울 운동장 집회 등 하나님 집회가 열린다는 소식만 들리면 저는 어디든지 달려갔습니다.
어느 집회를 막론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짓지 말라고 안타깝게 외치셨습니다. 구원을 얻으려면 티끌만 한 죄도 짓지 않아야 하고 이미 지은 죄는 은혜를 받아 씻어야 한다는 말씀에, 어떻게 하면 죄를 짓지 않을 수 있을지, 오직 깨끗하고 바르게 살고 싶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에 가득해졌습니다. 또 집회에 참석하면서 세상 어디에서도 느껴 보지 못한 기쁨과 즐거움이 마음에 충만했습니다. 누가 섭섭한 말을 한다든지, 이전 같으면 속상해했을 일이 생겨도 섭섭하거나 속상한 감정이 전혀 없이 그저 기쁘고 즐거울 뿐이었습니다. 항상 방긋방긋 웃는 어린 아기처럼 그때 제 마음이 꼭 그랬습니다.
그렇게 한 해가 지나 이듬해인 1956년 초부터는 원효로 구제단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원효로 구제단은 하나님 댁 마당에 지어진 예배실로, 은혜를 받고자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었습니다. 기차처럼 길게 생긴 예배실 뒤편으로 2층을 지어 올렸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워낙 많이 몰려들어 자리가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예배실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은 예배실 밖 둑에 빽빽히 늘어서서 스피커를 통해 찬송과 설교를 들으며 예배를 드렸습니다.
당시 저희 남편은 제가 하나님을 믿는 것을 심하게 반대했는데, 어느 날 저와 교인 한 분의 설득으로 마지못해 원효로 구제단 예배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제단 안에 앉을 자리가 없었지만 어느 교인이 자리를 양보해 주어 남편을 맨 앞자리에 앉혔습니다.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예배실에 들어간 남편은 예배를 드리고 나와서는 기분이 무척 좋아 보였습니다. 그리고 하는 이야기가, 예배 중에 갑자기 백합꽃 향기가 진동하고 목 안이 시원하면서 마음이 참 기쁘고 좋았다며, 제가 반대를 무릅쓰고 이곳에 오는 것이 이해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남편은 하나님께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종류의 죄를 지었다는 것을 지적하신 후 “이런 죄가 있으니 반대를 했지요.” 하시며 다 보신 것처럼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깨달은 것이 있었던지 남편은 제단에 열심히 다니게 되었고, 구로동제단을 개척할 때는 주일학교 부장을 맡아 제단 일에 정성을 쏟았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