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을 수 없는 전쟁
지난 6월 25일에 57주기를 맞은 6.25 전쟁은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절체절명의 운명의 분수령이 될 뻔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1950년의 그 전쟁에서 만일 북한 인민군의 T-34 전차부대가 최후의 낙동강 방어선을 끝내 돌파하여 미군과 국군을 부산 앞 바다로 몰아넣는데 성공했더라면, 우리는 지금 김일성 왕조 체제하에서 신음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6.25 전쟁의 비극은 한반도에 주둔하고 있던 미군이 철수하면서 시작되었다. 2차 대전 후 미국은 당시 유럽에 대한 러시아의 위협에만 초점을 맞추고 스탈린과 김일성의 야욕은 별 것이 아닌 것으로 오판하고 있었다. 미군이 철수하고 아무런 방어력이 없는 이 땅에 오랜 준비를 끝낸 인민군은 무인지경같이 침공해 왔다. 공산군은 개전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이어 급파된 미군의 선봉부대와 싸워 대전을 점령했다. 이후 공산군은 1950년 8월에서 9월 사이에는 경주, 영천, 대구, 창녕, 마산을 연결하는 경상남북도의 일부만 남긴 남한의 전 국토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반전시키고 압록강까지 북진했지만 대거 참전한 중공군과 싸워 한반도에 휴전을 성립시키기까지 3 년 동안 미국은 한국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지키기 위해 값 비싼 대가를 지불했다. 소모된 전비만 해도 540 억불이 넘었고, 전사 및 실종, 부상 등으로 총 13만 7천 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의 아들, 워커 8군사령관의 아들,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의 아들 등 수많은 고위층과 부유층의 자제들이 앞장서서 이 전쟁에 참전하여 최전선에서 싸웠고 참전 미군 중에는 미군 장성들의 아들 142명이 포함됐는데 이중 35명이 전사 또는 부상했다.
6.25 전쟁의 성격에 대해 좌파들은 침략전쟁이 아닌 통일 전쟁이라면서 우리 민족끼리의 싸움에 미국이 쓸데 없이 끼어 들어 전쟁의 피해만 키웠다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전쟁이었던 간에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좌파들을 포함한 어느 누구도 “제발 이 땅을 떠나 북한에 가서 살아라” 하면 한사코 거부한다는 것이다. 6.25 전쟁 이후 반세기, 북한에는 김일성 왕국이 건설되어 인민들은 굶주려 피골이 상접하게 되었고 남한은 자유와 민주가 넘쳐 나는 사회가 된 것이다.
워싱턴 DC에 있는 한국전쟁 기념공원에는 다음과 같은 문구가 새겨져 보는 이의 마음을 숙연하게 하고 있다. “우리의 아들 딸들은 한번도 만난 적이 없는 사람들, 전혀 알지도 못하는 나라를 지키라는 국가의 부름에 따라 생명을 바쳤다.” 1950년 6.25전쟁에서 미국인들은 가본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 태평양 반대편의 작은 나라 한국을 북한 공산군의 침략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남편과 아버지, 아들과 형제들을 잃었던 것이다. 그들이 흘린 피의 대가로 우리는 오늘 김일성 왕조 대신, 자유 민주의 땅에 살고 있다. 우리가 어찌 그 전쟁과 우리를 위해 희생한 친구들을 잊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