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이 인내하시고 부드러우시며 겸손하셨던 하나님
이교선(3) / 기장신앙촌제가 소사신앙촌에 들어갔을 당시는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으로 계실 때였습니다. 전도관과 신앙촌이 세워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께로 몰려오자, 다급해진 특정 종교계와 일부 정치인들이 결탁하여 아무런 죄도 없이 옥고를 치르시게 한 것이었습니다. 1960년 3월 26일은 하나님께서 출감하시던 날이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뵙는다는 기쁨에 소사신앙촌 정문에서부터 도열해 있었는데, 하나님께서는 댁에도 들르시지 않고 곧바로 노구산으로 향하셔서 오만제단의 단에 서셨습니다. 단상의 이쪽저쪽으로 다니시면서 오랫동안 떨어졌던 자식을 다시 만난 것처럼 자상한 눈빛으로 내려다보시던 하나님. 크나큰 고통을 당하셨건만 부드러우신 음성으로 여러분들의 죄를 씻어 주겠다고 하실 때 많이 흐느껴 울었습니다. 찬송가 253장 “멀리 멀리 갔더니 처량하고 곤하며 슬프고 또 외로워 정처 없이 다니니~” 하는 찬송을 밤새도록 인도하시던 그 모습이 지금도 가슴을 저리게 합니다. 그토록 모진 옥고를 치르신 후에도 오로지 가지들을 위하셨던 사랑을 어떻게 잊을 수가 있겠습니까.
1962년 9월 11일 덕소신앙촌에 입주한 저는 제과 공장의 인사 서무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제과 공장에서 생산하던 카스텔라, 캐러멜, 사탕 등이 없어서 못 팔 정도로 인기를 끌었는데, 저는 그것들을 커다란 박스에 한가득 넣어서 안성 집으로 부쳐 드렸습니다. 아버님도 맛이 있으셨던지 매일 매일 카스텔라 반 개씩을 드셨다고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용건이 있어 집에 다니러 갔을 때 아버지와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은 “너의 나이 27세이다. 이제 네 인생을 챙기거라.” 하시며 가정의 소중함을 중점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 세상에서 아무리 위대한 사람도 죽는 것을 끝으로 알고 살아가지만 저는 인생의 참된 소망을 찾았습니다. 감람나무께서 축복하신 생명물은 아무리 오래 놔두어도 썩지 않고, 악한 마음도 은혜로 씻으시면 백합꽃같이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아버지도 이 길을 아셨다면 누구보다 더 열심을 내셨을 겁니다.” 하고 말씀드리자 아버님은 너털웃음을 터뜨리셨습니다. 불과 얼마 전만 해도 전도관이 이단이니 못된 곳이라 하시면서 심하게 반대하셨는데, 그날은 온화하게 미소 지으시며 잠시도 자리를 뜨지 않으시고 제 이야기를 들어주셨습니다. 저는 어디서 그렇게 적합한 말이 떠오르는지 며칠을 계속해도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았습니다. 제가 은혜 받은 이야기며 신앙촌의 근면한 생활상을 말씀드리면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대화를 나누다가, 남동생이 아버님께서 피곤하시겠다고 걱정을 하여 이야기를 그쳤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시면서 “내가 신앙촌에 있는 집을 사 주지.” 하시며 그때부터 저의 모든 것을 후원해 주셨습니다. 제가 신앙촌 제품을 보내 드리면 아주 좋아하시며 친구 분들에게 자랑을 하셨고, 특히 하나님께서 축복해 주신 옷과 내복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셔서 장례식 때 입혀 달라고 당부를 하셨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생활하면서 하나님께서 친히 저희와 같이하시는 것을 자주 보게 되었습니다. 덕소신앙촌 제단을 건설할 때 사람들과 함께 한강을 건너셔서 자갈 모으는 작업을 진두지휘하셨고, 공사를 할 때면 수백 명의 물지게에 물을 대 주는 힘든 일을 도맡아 하셨습니다. 구원을 주시고자 그토록 희생하시고 고생하신 하나님. 교인들이 스스로 의식주를 해결하며 진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귀한 터전을 일구어 주셨습니다. 누구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무수히 가로막는 방해 속에서 하나님 홀로 이 역사를 이끄셨음을 이제야 뼈저리게 느끼게 됩니다.
1970년 기장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는 1971년 1월 29일에 입주하여 회계실에서 근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73년 초여름 어느 날, 점심을 늦게 먹은 것이 급체했는지 칼로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복통으로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엉금엉금 기다시피 집으로 오니 온몸이 덜덜 떨리며 한기가 느껴져서 생명물을 두 컵 마신 후 이불과 담요, 코트를 산더미처럼 쌓아서 얼굴까지 덮고 그대로 잠이 들었습니다.
꿈속에서 제가 넓은 벌판에 앉아 어린아이처럼 흙장난을 하고 있는데, 50m 정도 떨어진 곳에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저를 바라보며 오라고 손짓을 하셨습니다. 제가 움직이지 않으니 재촉을 하시며 “빨리 가자. 3시에 출발해야 밤 1시에 도착하는데 지금 6시다. 빨리 가자.” 하셨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시자 할아버지가 “저 아이를 데리고 가려고 합니다.” 하고 말씀드렸더니, 하나님께서 고개를 가로저으셨습니다. 그 순간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는 것이었습니다. 깜짝 놀라 눈을 떠 보니 오후 6시 정각이었습니다.
이불 더미를 헤치고 나오면서 마치 죽었다가 깨어난 느낌이었습니다. 머리카락이 땀으로 흠뻑 젖어서 수영장에서 나온 사람 같았으며, 입은 옷과 이불까지 땀에 젖어 있었습니다. 칼로 찌르는 것 같았던 날카로운 통증이 깨끗이 사라지고 온몸이 날아갈 듯이 가뿐하여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지 놀라울 뿐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인명을 좌우하신다는 것을 그때에 알게 되었습니다.
1999년 저는 기장신앙촌에서 샘솟는 생명물을 물통에 받아서는 잘 보관하느라고 장롱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이후로 그 장롱을 잘 사용하지 않게 되어 생명물이 있는 것을 잊어버린 채 지내다가 얼마 전에 생각이 나서 꺼내 보게 되었습니다. 8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음에도 처음 생명물을 받았을 때와 같이 맑고 깨끗한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낙원에 계신 지금도 생명물로 씻긴 시신이 아름답게 피어나고 이슬성신이 내리는 것을 보면서, 변함없이 저희와 함께해 주심에 무슨 말로도 감사를 다 드리지 못할 뿐입니다.
돌이켜보면 저는 10대에 접어들어 태평양전쟁과 육이오동란을 겪으면서 ‘앞으로 험한 세월을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막연한 두려움과 근심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러다 하나님을 뵙고 이 길을 따르면서 모든 두려움과 근심이 간곳없이 사라져 버리고 일생을 기쁘게 지내왔습니다. 한결같이 인내하시고 부드러우시며 겸손하셨던 하나님. ‘어쩌면 모든 권능을 가지시고도 그토록 겸손하실까!’ 이 땅에서 함께해 주셨던 시간이 떠오를 때마다 제가 어찌 하나님을 뵙고 지금까지 따라올 수 있었는지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또 드려도 부끄러울 뿐입니다. 천지는 변하여도 창조주 하나님의 말씀은 변치 않으시기에, 그 말씀대로 아름답게 살아서 그날에 멀리서라도 뵈올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