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성신이 비와 같이, 뽀얀 눈송이같이 쏟아져

최경희 승사(1) / L.A.교회
발행일 발행호수 21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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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저는 1923년 함경북도 경흥군 웅기읍에서 2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독실한 장로교인이신 어머니(故 이용복 권사)를 따라 교회에 다니긴 하면서도 신앙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스물세 살에 결혼한 저는 서울 청량리로 이사 와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1955년이었습니다. 어머니는 박태선 장로님이라는 분이 남산에서 집회하실 때 참석하셨는데, 그때부터 박 장로님께서 집회하시는 곳마다 열심히 따라다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박 장로님께서 전도관을 세우셨다며 저도 함께 가자고 권유하셨습니다. 하루는 전도관에서 집회가 열리니 참석해 보자고 하셔서 어머니를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부산 영주동 산에 대지를 마련하고 3층 규모의 제단 신축을 시작
교인들이 자발적으로 건축을 돕는 속에 나도 동참했는데
성신의 은혜 속에 피곤함을 모르고 몸은 날듯이 가벼워져

용산구 원효로 3가에 위치한 전도관은 기차처럼 기다란 모양의 예배실이었습니다. 그곳에 수백 명은 족히 되는 사람들이 빼곡히 앉아 몇 시간씩 계속되는 설교 말씀을 경청했습니다. 그 말씀은 제가 장로교회에서 듣던 것과 너무나 달랐습니다. 박 장로님께서는 은혜를 받아 죄를 씻어야만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하셨는데, 예배당 안에만 들어가면 구원을 받는 줄 알았던 저로서는 난생처음 듣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날 예배 참석자들은 모두 안찰을 받게 되었습니다. 저보다 먼저 안찰을 받은 어떤 사람은 박 장로님께서 눈에 손을 대시자 눈알이 빠지는 것처럼 아팠다고 했습니다. 제가 안찰받을 때는 박 장로님의 손이 배에 닿자마자 무언가 불쑥불쑥 하며 튀어나오더니, 그 덩어리가 박 장로님의 손을 피해 이쪽저쪽으로 움직이는 것이었습니다. 박 장로님께서 힘주어 누르시는 것도 아니고, 살짝 손을 대실 뿐인데 그 통증은 어떻게 다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어머니를 따라 원효로전도관에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뿐 아니라 언니와 제 아이들 네 명까지 모두 전도를 했습니다. 날씨가 점점 추워지자 당시 드물었던 택시를 불러 제단에 데리고 가셨고, 예배실에 미군 담요를 깔고 저희 식구들을 앉히기도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예배 시간에 어찌나 춥던지 바로 앉을 수가 없어서 몸을 잔뜩 움츠리고 있는데, 박 장로님께서 “따뜻하게 해 줄까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하시자마자 주변에 훈훈한 기운이 감돌면서 온몸이 후끈해지는 것이었습니다. 방금 전까지 추워서 어쩔 줄을 몰랐는데 추위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포근하고 따스하기만 했습니다.
그 후 부산 대신동으로 이사해서도 어머니와 함께 대신동전도관에 나갔습니다. 어느 일요일, 박 장로님께서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실 때였습니다. 설교하시던 박 장로님께서 단상을 힘 있게 “쾅!” 하고 내려치시자, 거기서 불덩이가 나오더니 저와 좀 떨어져 있던 어머니에게로 확 날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덩이가 어머니에게로 날아가니 저는 깜짝 놀라서 “어머니!”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그 불덩이를 보지 못했는지 의아한 표정으로 저를 쳐다보았고 어머니는 다 안다는 듯이 빙그레 웃기만 하셨습니다. 그 불이 하나님께서 주시는 불 성신임을 나중에 알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대신동제단 교인의 어린 아들이 숨을 거두어 입관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 시신을 유리관에 안치해 두었는데, 아이가 얼마나 곱고 예쁘게 피었는지 인형도 그런 인형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스르르 잠이 든 것처럼 눈을 감고 입술과 두 뺨에 발그스름한 혈색이 감도는 모습은 죽은 아이라고는 상상할 수도 없었습니다. 유리관을 제단에 두고 수많은 사람에게 시신을 보여 주었는데, 다들 살아 있는 아기보다 더 예쁘다며 놀라워했습니다.

그때까지 죽은 사람을 본 적이 없었던 저는, 어느 집에서 장례가 났다 하면 그 집을 피해 아무리 멀어도 빙빙 돌아가곤 했습니다. 시신을 생각하면 왠지 무섭고 싫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유리관에 누워 살포시 미소 짓고 있는 그 아기는 제 생각과 너무나 달랐고, 무섭고 싫기는커녕 자꾸만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흉한 시신이라도 은혜를 받으면 그토록 아름답게 피어난다는 것을 그때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1957년부터는 영주동 산에 대지를 마련해 3층 규모의 웅장한 제단을 짓기 시작했습니다. 교인들 스스로 건설 일을 돕는 분위기 속에 저도 동참하게 되었는데, 처음에는 비계(높은 곳에서 공사를 할 수 있도록 임시로 설치한 가설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천야만야 낭떠러지 같았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서 한 걸음도 옮길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일하는 중에 백합꽃 향기같이 향긋하고 좋은 냄새가 진하게 맡아지면서 저도 모르게 힘이 솟아나는 것이었습니다. 모래 짐을 지어도 그 무게를 전혀 느낄 수 없었고 날아가는 것처럼 비계 위를 다녔습니다. 그렇게 일을 도운 후 대신동제단에서 저녁예배를 드릴 때면 피곤한 것 하나 없이 몸이 너무나 가벼웠습니다. 어떤 때는 제단 안에 비가 막 쏟아져서 ‘실내에 웬 비가 쏟아지나?’ 하며 제 옷을 만져 보면 보송보송할 뿐 하나도 젖지가 않은 것이었습니다. 또 흰 눈과 같이 뽀얀 것이 펑펑 내려서 손에 받아 보면 아무것도 없는 때도 있었습니다. 그 신기한 체험들은 바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향취 은혜와 이슬성신이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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