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성신을 내리는 존재가 감람나무

안병화(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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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이듬해 봄에는 박 장로님께서 부산 대신동에 전도관을 세우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매주 박 장로님께서 예배를 인도하시는데 사람들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이 모인다고 했습니다. 같이 제일교회에 다녔던 언니(안병애 권사, 현재 기장신앙촌 소속)는 그때부터 대신동전도관에 나가기 시작했고, 저에게 기성교회는 구원이 없다며 전도관으로 오라고 했습니다. 저는 박 장로님 집회에서 은혜를 받긴 했지만 언니의 말이 크게 와 닿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장로교회에 계속 다니며 예전부터 하고 싶었던 성가대에도 가입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성가대를 하면서 고민이 생겼습니다. 제 또래 젊은 친구들이 성가 연습은 뒷전이고 남녀가 어울리는 데만 관심을 쏟아서 ‘경건해야 할 교회에서 이럴 수가 있나?’ 싶었습니다. 심지어 예배 시간에 성가대석에 앉아 있으면서도 쪽지를 주고받으며 장난하는 모습에 이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장로교회에서 나와 대신동전도관에 나가게 됐습니다.

다른 직원들이 찬송가를 부르면
“너희도 찬송 불러 봐. 아주 좋아”
함께 찬송 부르며 일하다가 얼굴을
보면 배꽃같이 환하게 피어

저와 같이 직조 공장에서 일했던 친구 두 명도 박 장로님 집회에 참석하더니 얼마 후 전도관 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친구들과 일하면서 찬송가를 자주 불렀습니다. 다른 직원들이 유행가를 부르면 “너희도 찬송을 불러 봐. 아주 좋아.” 하며 찬송을 가르쳐 주기도 했습니다. 친구들과 같이 찬송 부르며 일하다가 서로 얼굴을 쳐다보면 배꽃같이 환하게 피어서 참 예뻤습니다. 때로는 박 장로님 집회에서 맡았던 좋은 향기가 진동하기도 했습니다.

그 후 1957년 4월에는 서울 이만제단 개관집회에 참석했습니다. 한강변에 세워진 이만제단은 크고 웅장했습니다. 산언덕 제단까지 오르는 길은 전도관 교인들로 가득 찼고 예배실도 3층까지 발 디딜 틈이 없었습니다. 예배 시간에 박 장로님께서 설교하시며 강대상을 힘차게 치시자 뽀얀 안개 같은 것이 확확 쏟아져 나왔습니다. 그때 박 장로님께서 “지금 뽀얗게 은혜가 내리는 것이 보입니까?” 하고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보인다고 대답하자 박 장로님께서 “내가 바로 그 은혜를 내리는 감람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이만제단 개관집회 때 박 장로님께서 설교하시며 강대상을 힘차게
치시자 뽀얀 안개 같은 것이 확확 쏟아져 나와 “지금 뽀얗게 은혜가
내리는 것이 보입니까?“ 하고 물으시자 사람들이 보인다고 대답해
박 장로님께서 “내가 바로 그 은혜를 내리는 감람나무”라고 하셔

집회에서 설교 말씀을 들으며 저는 성경상의 ‘감람나무’를 알게 됐습니다. 호세아 14장을 보면 이슬 같은 은혜와 향기에 대해 기록돼 있으며 그 은혜를 내리는 존재가 바로 감람나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직접 보고 체험한 은혜가 성경에 적혀 있다는 것이 무척 놀라웠습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내리시는 박 장로님이 감람나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장로교회에 다닐 때는 은혜라는 말은 들어 봤지만 체험해 본 적은 없었습니다. 목사 설교가 재미있으면 “오늘 설교가 은혜스럽다.” 하는 정도였습니다. 감람나무가 계시는 전도관에는 분명히 은혜가 있고 체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예배 중에 박 장로님께서 “병자들은 일어나라!” 하고 외치시면 사람들이 곳곳에서 일어났습니다. 제 앞에는 앉은뱅이 처녀가 있었는데 박 장로님 말씀을 듣고 갑자기 몸을 움직이더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처녀는 태어나 처음 일어섰다며 눈물을 쏟았습니다. “하나님… 고맙고… 감사합니다.” 하며 말을 잇지 못하더니 결국 울음을 터뜨렸습니다. 아직 힘이 없어 다리를 약간 떨긴 했지만 평생 앉은뱅이로 살아온 사람이 정상이 됐으니 얼마나 기쁘고 감격스러울까 싶었습니다. 저도 가슴 한편이 뭉클했습니다.

“병자들은 일어나라” 하니 내 앞에
앉은뱅이 처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어나서 처음 일어섰다며
감사의 눈물 쏟는 모습 보고 뭉클

그해 가을에는 경기도 부천에 신앙촌을 세우신다는 소식을 듣고 저는 언제쯤이면 갈 수 있을까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여서 살게 되는 신앙촌에 하루라도 빨리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드디어 1958년 3월 저는 병애 언니와 신앙촌에 들어가 타월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장로교인이셨던 부모님은 언니의 권유로 전도관에 나오기 시작하셨는데 그해 11월 식구들을 데리고 소사신앙촌에 입주하셨습니다.

저는 소사신앙촌에서 처음으로 안찰을 받았습니다. 한 명씩 안찰받는 동안 길게 줄을 서서 기다렸는데 하나님께서 손을 대시기만 하는데도 버둥거리며 아프다고 소리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제 차례가 되어 두 눈에 손을 대시자 눈알이 빠질 것처럼 아팠습니다. 분명 손을 대기만 하시는데 깊숙이 후벼 파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얼마가 지났을까, 통증이 차츰 사라지고 눈이 시원해질 때 손을 떼셨습니다. 안찰을 받고 나니 하나님께서 성신을 부어서 내 죄를 씻어 주시며 죄로 인해 그렇게 아프다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죄짓지 않으려고 마음과 생각을 돌아보며 자제하고 조심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입주했을 때는 신앙촌에 주택이며 공장, 학교가 한창 지어질 때였습니다. 건설대 소속이 아니어도 벽돌을 이고 지고 나르며 건설을 돕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스스로 즐겁게 일하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저도 하고 싶어 머리에 벽돌을 얹었더니 어렸을 때 다친 등이 아파서 움직이기가 어려웠습니다. 다들 하는 일을 나만 못하나 하며 속이 상했는데 문득 길에 놓인 지게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벽돌을 나르는 사람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지게였습니다. 지게를 지고 벽돌을 얹었더니 등이 아프지 않아 마음껏 나를 수 있었습니다. 누가 가져갈 새라 지게를 공장에 뒀다가 일을 마치면 곧장 등에 지고 벽돌 나르는 곳으로 갔습니다.

(안병화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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