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슬같은 은혜를 내리시는 감람나무임을 은혜를 받고 깨달아

박금석 권사(2) / 소사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3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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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그 후 영주 장로교회의 주일예배 시간에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평소 박 장로님을 ‘은혜 많으신 분’이라고 하던 계 목사가 그날은 어찌된 일인지 박 장로님이 속임수를 쓴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박 장로 집회에서 향기가 나는 것은 향수를 진하게 뿌려서 그런 것이고, 사람들이 불을 받았다고 하는 것은 찬송할 때 손뼉을 치다 보니 몸에 열이 나서 뜨거움을 느낀 것이다.”라고 했습니다. 저는 ‘왜 저런 말을 할까?’ 하며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가 불성신을 받은 때를 생각해 봐도 손뼉을 치지 않는 설교 시간이었고, 더욱이 그 뜨거움은 손뼉을 쳐서 열이 나는 정도와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 은혜를 목사도 알고 있을 텐데……. 언제는 박 장로님께 가서 은혜를 받으라고 하더니 왜 갑자기 저러는 것일까?’ 하며 납득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원효로전도관에 다니던 영주교회 교인들은 서로서로 쳐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중에서 저와 친하게 지냈던 이광옥 집사님은 예배를 마친 후 저를 보고 “박 장로님에 대해서 저런 말을 하다니 여기는 아닌 것 같다. 우리 이제 여기 나오지 말자.”라고 했습니다. 저도 ‘받은 은혜가 분명한데 더 이상 여기에 다닐 수 없겠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날부터 영주교회에 발길을 끊고 원효로전도관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평소 박장로님을 칭송하던 목사가
`박 장로 집회의 향기는 향수를 뿌렸기 때문이고
몸이 뜨거워지는 것은 손뼉을 치기 때문`이라고 돌변

이듬해인 1957년 4월에는 한강을 굽어보는 청암동 산언덕에 이만제단이 세워지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평일에 볼일이 있어서 이만제단에 간 적이 있었는데, 저는 예배실 문을 열다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예배실에 안개같이 뽀얀 것이 가득하여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며, 아주 향기로운 냄새가 쏟아붓는 것처럼 진하게 맡아지는 것이었습니다. 그 향기가 너무나 강하게 맡아져서 저도 모르게 “어머나!” 하고 소리를 쳤습니다. 향기를 맡은 순간부터 몸이 가볍고 상쾌하여 공중에 둥둥 뜨는 기분이었고, 입 안이 ‘화-’ 하면서 시원하고 달콤한 물이 목으로 꿀꺽꿀꺽 넘어갔습니다. 이만제단 종각에 있는 사무실을 향해 가는 동안에도 그 향기가 계속 진동하는데 마치 향기가 제단에 빈틈없이 꽉 차 있는 것 같았습니다. 저는 이전에 다른 교인들이 향기로운 향취를 맡았다고 하던 체험담을 떠올리면서 ‘이 향기가 바로 향취 은혜인가 보다.’ 하고 생각했습니다.

예배실 문을 연 순간 안에 안개 같이
뽀얀 것이 가득해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쏟아붓듯 진하게 향기가 맡아져
향기를 맡자 상쾌하여 공중에 뜨는 듯

그 후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릴 때 신기한 광경을 보게 되었습니다. 단상에 서신 박태선 장로님께서 설교를 하시다가 강대상을 힘 있게 내려치셨는데, 그때마다 강대상 양쪽에서 뽀얀 것이 확확 뿜어져 나오는 것이었습니다. 처음에 저는 ‘저게 뭘까? 먼지인가?’ 하고 생각했지만, 그 뽀얀 것이 단상 아래 사람들이 있는 곳까지 멀리 퍼지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먼지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나중에 다른 분들에게 물어봤더니 그 뽀얀 것이 바로 ‘이슬같이 내리는 은혜’라고 했습니다. 당시는 박 장로님께서 예배 시간마다 성경 호세아 14장을 설명하시며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고 향기를 내리는 자는 감람나무”임을 증거하시던 때였습니다. 저는 그 은혜를 직접 보고 말씀을 들으면서 박 장로님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감람나무’이심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설교 도중 강대상을 힘있게 내리치시자 뽀얀 것이 확확 뿜어져 나와
그 뽀얀 것은 단상 아래 멀리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퍼져나가
은혜를 보고 말씀을 들으며 ‘이슬 같은 은혜를 내리는 감람나무’ 깨달아

이만제단에 다니는 동안 참 기쁘고 즐거운 일이 많았습니다. 서울운동장에서 ‘전국 전도관 체육대회’가 열린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설레는 마음으로 운동복을 사 놓고 날짜를 손꼽아 기다렸습니다. 체육대회에서 배구와 농구, 마라톤 같은 정식 종목 외에도 공 굴리기나 박 터뜨리기처럼 재미로 하는 경기가 있어서 경기를 하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모두 웃으며 즐거워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이만제단에 ‘특별전도대’가 생기면서 특전대원으로 활동을 했습니다. 전도관을 전혀 모르시는 부모님과 친척들이 항상 안타까웠던 저는 특전대원 한 명과 같이 고향에 내려가서 전도를 했습니다. 원래 말이 없었던 제가 친척 어른 분에게 감람나무와 전도관에 대해 차근차근 말씀드렸더니, 저희 언니는 “네가 언제 이렇게 말을 잘하게 됐니?” 하며 놀라워했습니다. 전도를 할 때면 저도 모르게 용기가 솟아나며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었습니다. 당시 특전대원들은 밴드대를 앞세우고 노방 전도를 자주 했는데, 서울 시내를 다니며 “감람나무 이겼네~” 하는 찬송을 신나게 불렀던 때가 지금도 생생하게 떠오릅니다.

전도관을 모르던 보모님과 친척들을 늘 안타까워 하다
전도하러 고향으로 가 전도를 할 때
나도 모르게 용기가 솟고 그렇게 기쁘고 즐거울 수가 없어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면서 저는 건설대에 자원을 했습니다. 영모님께서는 ‘신앙촌은 은혜 받은 식구들이 모여 사는 신앙의 울타리’라고 하시며 “첫째 울타리, 둘째 울타리, 셋째 울타리까지 건설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난생처음 해 보는 건설 일이 많이 서툴렀지만 귀한 신앙의 울타리를 짓는 데 동참하는 것이 참 기쁘고 보람되었습니다. 당시 건설대원들은 열심히 즐겁게 일하는 속에서 무거운 질통을 먼저 지려고 하고 힘든 일을 서로 하려고 했습니다.

그 후 1962년에 덕소신앙촌이 건설되어 저는 덕소에 입주를 했습니다. 그리고 제과 공장에서 몇 년 동안 일하다가 서울로 나와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혼 후에 서대문제단에 다니면서 집사 임명도 받았으나 1971년경 남편이 병을 앓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하루하루 먹고살기에 급급해졌습니다. 딸아이 둘을 키우며 직장에 다녔는데 야간 근무를 자주 하다 보니 제단에 갈 시간이 없어서 점점 제단과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던 1990년경 어느 날 이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꿈속에서 제가 방 안에 앉아 있는데 어디선가 음성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젓가락을 하나만 세우면 쓰러지고 말지만 여러 개를 함께 묶어 놓으면 단단해서 쓰러지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어디서 이런 말이 들리지?’ 하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떤 남자 분의 사진이 벽에 걸린 것을 봤는데, 사진 속의 그분은 하얀 양복 차림에 안경을 쓰고 계셨습니다. 저는 잠에서 깬 뒤에 젓가락에 대한 이야기를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만제단 시절에 영모님께서 그런 말씀을 하셨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습니다. 제 기억으로는 신앙촌에 대해 설명하시며 은혜를 입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생활하면 신앙이 더욱 굳건해진다는 말씀인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사진 속에 계시던 그분이 누구실까?’ 하고 생각을 해 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왜 갑자기 이런 꿈을 꾼 것일까? 꿈이 참 이상하다.’ 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꿈을 잊어버리고 지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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