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받고보니 세상의 근심과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김동남 권사(2)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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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그러던 어느 날 예배를 드릴 때였습니다. 한참 찬송을 하는 중에 갑자기 아주 향기롭고 좋은 냄새가 진동했습니다. 방금 전까지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는데 별안간 향기가 예배실을 가득 채운 것처럼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저는 교인들이 향취 은혜라고 이야기하던 것이 떠올라 이 향기가 바로 은혜인가 보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향기 속에서 찬송을 부르며 마음이 참 기쁘고 즐거웠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서도 계속 찬송을 불렀습니다.

그전까지 저는 끔찍한 전쟁을 겪고 고생을 하면서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가나 하는 근심과 걱정이 많았습니다. 의지할 데도 없고 박복한 제 처지가 한탄스러웠습니다. 한강 다리를 건너며 ‘여기서 뛰어내리면 고생스런 삶을 끝낼 수 있겠구나.’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만제단에서 은혜를 받고 돌아오던 날 근심과 걱정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리고 저도 모르게 입가에서 찬송이 흘러나왔습니다.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계속 웃게 되었습니다. 찬송을 부르며 산들바람이 불어오는 한강 다리를 즐겁게 걸어갔습니다.

시신 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
곱게 피었다는 폐병환자의 시신을 보니
입관예배 전까지 마르고 창백했던 얼굴
보기 좋게 살 오르고 혈색까지 감돌아

한번은 이만제단에 다니던 아가씨가 폐병을 앓다가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교인들은 입관예배를 드린 후 시신이 곱고 예쁘게 피었다며 보러 가자고 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무서웠던 기억이 있어서 망설였지만 시신이 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서 따라가게 되었습니다. 보통 폐병 환자는 몸이 마르고 얼굴에 병색이 짙은 것을 많이 봤는데 그 아가씨는 폐병을 앓았다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얼굴에 포동포동 살이 올라 있었습니다. 피부는 뽀얗게 피고 양 볼과 입술에 볼그스름하게 혈색이 감돌아 화장을 한 것 같았습니다. 교인들이 하는 말이, 숨을 거둔 뒤에는 해골처럼 마르고 얼굴도 창백했는데 예배를 드린 후 보기 좋게 살이 오르고 혈색까지 감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온몸이 살아 있는 사람처럼 노긋노긋 부드럽다며 팔과 손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것을 보여 주었습니다.

저는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시신의 팔다리를 곧게 편 후 베로 꽁꽁 묶는 것을 봤습니다. 시신이 뻣뻣하게 굳은 후에는 움직일 수가 없기 때문에 반듯하게 펴서 입관하기 쉽게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어렸던 저는 꽁꽁 묶인 어머니의 모습이 무서워서 가까이 가지 못했습니다. 늦둥이 막내여서 어머니의 사랑을 많이 받았지만 돌아가신 후에는 자꾸 무서운 생각이 들었고, 장례를 마치고 나서도 한동안은 시신이 있던 방에 들어가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입관예배를 드린 후 곱게 핀 시신을 봤을 때는 무서운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편안하게 누운 고인은 잠시 단잠이 든 사람 같았습니다. 성신이 임하시면 시신이 아름답게 핀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신앙촌에 들어가 살고 싶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살다보니
어느새 내 생활은 밝고 활기차게 되었고 이만제단에서 예배 드리며 향취가
진동할 때면 세상에서 내가 제일 큰 복을 받은 사람 같이 느껴져

한번은 예배 시간에 하나님께서 신앙촌을 건설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은혜 받은 교인들이 한곳에 모여 살게 된다고 하시며 이런 주택을 지을 거라고 기다란 그림을 펼쳐서 보여 주셨습니다. 지붕에 산뜻한 색깔을 입힌 신식 양옥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또 우리 힘으로 먹을 것, 입을 것을 만들도록 공장을 세운다고 하시며 기술을 가진 교인이 있는지 알아보라고 하셨습니다. 기술이라는 말씀에 저는 귀가 번쩍 뜨였습니다. 저는 제단에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아 신앙촌에 입주할 자격이 안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기술을 배우면 신앙촌에 갈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생겼습니다. 예전에 직조 공장에서 잠시 일했던 저는 그때부터 작은 직조 공장에 다니며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태창방직이라는 큰 공장으로 옮겨서 일을 했습니다. 신앙촌에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으로 하루하루 열심히 기술을 익혔습니다.

한번은 공장에 새로 들어온 직원에게 전도관 이야기를 하여 이만제단에 데려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보다 열 살 아래인 그 직원은 그때부터 이만제단에 꾸준히 다니게 되었고 저와 친하게 지냈습니다. 그다음에는 성격이 활달하고 기성교회에 열심히 다니는 직원을 전도했는데, 이 직원은 한번 전도관에 다녀온 후로 기숙사에 있는 직원들을 전부 찾아다니며 전도관에 같이 가자고 했습니다. 제단에 다니는 직원들이 많아지면서 일요일이면 기숙사에서 나와 이만제단으로 가는 직원들의 행렬이 꼬리를 물고 길게 이어졌습니다. 그때는 예배를 마친 후 하나님께서 안수를 해 주셨는데, 안수 받을 때 아주 좋은 향기가 진동하더라고 이야기하는 직원도 있었습니다.

신앙촌 건설에 대한 말씀을 들은 후
신앙촌에 입주할 자격을 갖추기 위해
직조 공장 다니며 열심히 기술을 익히고
직원들 전도해서 이만제단에 같이 다녀

1957년 11월 경기도 부천에 소사신앙촌이 건설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이만제단 교인들이 전세 버스를 타고 신앙촌을 견학하러 간 적이 있었습니다. 신앙촌에는 하나님께서 그림으로 보여 주셨던 양옥 주택이 속속 지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전쟁으로 허물어진 서울만 보다가 새롭게 건설되는 신앙촌을 보니 참 놀라웠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귀한 신앙촌에 들어오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습니다.

그 즈음 저는 딸아이와 같이 살게 되었습니다. 그 전까지 형편이 어려워서 떨어져 지냈지만 공장에 다니며 생활이 안정되면서 같이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예전의 어둡고 우울한 마음을 완전히 벗어 버리게 되었습니다. 신앙촌에 들어가고 싶어서 열심히 살다 보니 어느새 밝고 활기차게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이만제단에서 예배를 드리며 향취가 진동할 때면 ‘저한테도 이렇게 큰 복을 주십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세상에서 제일 큰 복을 받은 사람 같았습니다.

(김동남 권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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