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마다 그 세계와 가까워지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려

김동남 권사(3) / 기장신앙촌
발행일 발행호수 2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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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신보 사진

이듬해인 1958년 2월 딸과 함께 소사신앙촌에 입주한 저는 직조 공장에서 근무했습니다. 당시 공장에서 작업을 마치고 나면 건설하는 곳에 가서 일을 돕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다들 힘들고 어려운 일을 하려고 했기 때문에 무거운 짐을 지는 지게를 서로 가져가려고 했습니다. 저도 건설 일을 돕느라고 했지만 몸집이 작아서 남들처럼 벽돌을 많이 지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건설하는 곳에 자주 나오셔서 함께 일하셨으며 사람들에게 안수를 해 주기도 하셨습니다. 안수를 받고 나면 온몸이 가볍게 느껴져서 무거운 지게를 지고 훌훌 나는 것처럼 다녔습니다.

저는 직조 공장에서 다른 직원들에게 기술을 가르쳐 주었는데 모두들 열심히 기술을 배우며 일했습니다. 그러나 기술자가 대부분인 여느 공장과 달리, 직조를 전혀 모르던 사람들이 모여서 제품을 만드는 것이 쉽지는 않았습니다. 그런 것을 보며 신앙촌의 공장은 다른 공장처럼 돈만 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신앙촌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먹고살 기반을 마련해 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공장을 세우시고 희생과 수고를 하신다는 것을 어렴풋이나마 느끼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뵙는다는 기쁨에 한달음에 오만제단으로 달려가 단상에 서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양동이에 담긴 물을 머리 위에서 확 쏙는 것처럼 향취가 온몸을
감싸며 진하게 맡아졌고 밤새워 찬송을 불러도 피곤치 않고 기쁨이 넘쳐

그러던 1958년 12월 하나님께서 영어의 몸이 되셨습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전국적으로 뻗어 가는 전도관의 기세에 놀란 종교 세력과 그 종교 세력을 등에 업은 정치인들이 하나님께 터무니없는 죄목을 씌운 것이었습니다. 1960년 3월 옥에서 나오신 하나님께서는 곧바로 소사신앙촌 오만제단에 오셔서 예배를 인도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뵙는다는 기쁨에 신앙촌 사람들은 한달음에 오만제단으로 달려갔습니다. 저 멀리 단상에 서신 하나님을 바라보는 순간 양동이에 담긴 물을 머리 위에서 확 쏟는 것처럼 향취가 온몸을 감싸며 진하게 맡아졌습니다. 하나님의 인도로 찬송을 부르고 예배를 드리는 내내 향취가 맡아졌습니다. 예배를 마치고 나니 어느새 밤이 지나고 날이 환하게 밝아 있었습니다. 예전에 하나님의 부흥집회에 참석한 분들이 밤을 새워 찬송을 불러도 피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바로 이런 것인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음이 기쁘고 즐거워서 집에 돌아가는 발걸음이 땅에 닿지 않고 둥둥 떠가는 것 같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날부터 신앙촌 주민들에게 안수와 안찰을 해 주셨습니다. 모진 옥고를 치르고 돌아오신 후에도 한시도 쉬지 않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신 하나님이셨습니다. 이제 와서 생각하니 은혜를 받아 기뻐할 줄만 알았지 하나님의 고초와 고생은 너무도 몰랐던 것이 한없이 부끄럽습니다.

생명물로 시신을 씻기고 입관을 마친 후
시퍼렇던 고인의 피부는 순백색으로
아기 피부처럼 맑고 뽀얗게 광채까지 나
장례식 참석한 사람들 모두 놀라워 해

그 후 덕소신앙촌에 입주해 직조 공장에서 근무하다가 1971년 1월에 기장신앙촌으로 오게 되었습니다. 기장신앙촌에는 1동 건물에 직조 공장이 있었으며 최신식 기계가 활기차게 돌아가며 생산을 했습니다. 직조 공장 옆에 있던 농구장(지금의 롤러스케이트장)에서는 직원들이 자주 농구 경기를 했습니다. 근무를 마친 후 열심히 농구를 연습했는데 저는 경기를 구경하는 것이 참 재미있었습니다. 1동, 2동, 3동 건물 별로 팀을 짜서 경기할 때면 직원들이 기발한 응원을 준비해서 옷도 맞춰 입고 신나게 응원을 했습니다.

저는 신앙촌에서 생활하면서 입관예배에 자주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군대에서 복무하던 교인이 사고로 숨을 거두어 입관예배를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기장신앙촌에 있던 유족들이 부대에 요청해 신앙촌에서 장례식을 치르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교인들이 예배를 드리며 찬송을 부르는 동안 장례반 권사님들이 생명물로 시신을 씻겼습니다. 저는 입관을 마친 후 고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예전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피부색이 점점 시커멓게 되더니 푸릇푸릇하게 시퍼런 빛을 띠는 것을 봤는데, 생명물로 씻긴 후 그분은 ‘피부가 어쩌면 저렇게 하얗게 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순백색을 띠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아기 피부처럼 맑고 뽀얗게 핀 데다 형광등을 켜 놓은 것처럼 환하게 광채가 나는 모습이었습니다. 장례식에 참석한 군인들도 그 모습을 보고 죽은 사람 얼굴이 이렇게 좋을 수가 있냐며 놀라워했습니다.

은혜를 주시고 죄 씻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노력이 부족해 구원 못 얻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에 있는 힘을 다해
애쓰고 노력해야겠다고 다짐

1981년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이심을 밝히셨습니다. 초창기부터 이슬 같은 은혜를 주시는 ‘감람나무’이심을 가르쳐 주셨는데, 그 감람나무가 곧 하나님이심을 그때 비로소 밝히신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존재에 대해 말씀해 주셨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성신을 받아 죄가 완전히 소멸되어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존재로 바뀌어야 천국에 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이렇게 은혜를 주시고 죄를 씻어 주시는 하나님을 만났는데 내 노력이 부족해서 구원을 못 얻으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르쳐 주신 말씀대로 죄를 멀리하려 애쓰고 노력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지난 1월 축복일에는 신앙촌에서 반가운 얼굴을 만났습니다. 1957년 제가 서울에서 직조 공장에 다니며 기술을 배울 때 같이 일했던 후배(서울 천호교회 사공수자 권사)를 만난 것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이만제단으로 전도한 후배였습니다. 서울에서 제단에 다닌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자주 만나지 못했는데 우연히 식당에서 만나 서로 손을 붙들고 한참을 반가워했습니다. 나이가 20대와 10대일 적에 처음 만났는데 어느새 80대와 70대가 되었다며 함께 웃었습니다. 이 귀한 길을 열심히 걸어가자고 격려해 주었습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면 ‘하나님 감사합니다.’ 하는 기도가 절로 나옵니다. 나이는 여든이 넘었지만 아픈 데 없이 건강하게 지내며 힘닿는 대로 봉사도 하고 있습니다. 하루 몇 시간씩 봉사하며 움직이는 것이 건강에도 좋은 것 같습니다. 제 소원은 내일 가더라도 오늘까지 건강하게 지내며 일하는 것입니다. 누군가 저에게 묻기를 “신앙촌에 살면서 언제가 제일 좋아요?”라고 하기에 저는 “매일”이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평생을 신앙촌에서 살면서 하루하루가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오늘도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면서 맑고 성결한 생활을 할 것을 다짐해 봅니다. 날마다 그 세계와 가까워지는 자가 되기를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립니다. 하나님 감사합니다.

(김동남 권사님 신앙체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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